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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윤평중 칼럼]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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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정략적으로 남용하면 정당성 찌르는 양날의 칼

文 정부는 특권 계급 옹호하고 정의를 자기들 이익으로 專有

보편적 정의로 한계 극복해야 야만 퇴행 막을 수 있어

조선일보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정치적으로 남용되는 정의와 공정 담론은 양날의 칼이다. 정적(政敵)을 벤 칼이 되돌아와 정권의 정당성을 찌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년의 날’ 연설에서 공정을 서른일곱 번 강조했다. 정의 사회와 공정 사회를 외친 전두환·이명박 정권은 권력이 사라지자 정의의 칼을 맞고 감방으로 직행했다. 서양에서 정의의 여신은 칼을 휘두르는 존재고 동양에서 의(義)는 창칼로 잡은 희생양을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권력이 정의를 정략으로 사용할 때 정의는 폭력이 된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며 정의와 권력의 결탁을 옹호했다. ‘법률도 강자의 편익을 관철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덧댔다. 정권이 자기들의 이익을 정의로 공표한 후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로 처벌한다는 논리다. 철학사에서 그의 억설(臆說)은 법과 정의가 ‘보편적 옳음’임을 논증한 소크라테스의 정론(正論)에 패배했다. 현실은 다르다. 피 튀기는 권력 정치의 현장에서 트라시마코스는 건재하다.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의 대결은 철학책에서만 종료됐을 뿐 현실에선 팽팽하다. 트라시마코스의 궤변이야말로 ‘추미애 사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린 진흙탕 현실에서만 뒹굴 수 없다. 인류가 권력 정치의 아수라장에 매몰된다면 역사 발전은 불가능하다. 약육강식의 포로인 짐승들과 달리 인간은 대지에 발을 딛고 하늘의 별을 올려다본다. 보편타당한 정의를 이루려는 갈망으로 역사를 만들어간다. 세계사는 자유와 정의를 쟁취해 온 피와 땀의 기록이다. 역동적 한국 현대사는 더욱 그렇다.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는 궤변을 보편적 정의로 넘어서야 야만으로 퇴행하는 걸 막을 수 있다.

고난의 한반도 현대사가 이런 근본 이치를 증언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101년 전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도 민주공화정을 선포했다. ‘힘이 곧 정의’라는 제국주의의 행패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최초 헌법인 1919년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이라고 규정한다(제3조). 나라의 주춧돌이 된 이 위대한 선언을 계승한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대한민국 헌법 11조 1항과 2항)

대한민국은 특권 계급 일체를 부정하는 법치국가다. 불법을 저지른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법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 이유다. 하지만 문 대통령과 정권 실세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 울산시장 선거에서 청와대가 관권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정권 유착 경제 범죄가 범람하며 고위 관료가 거액 뇌물을 받아도 면죄부를 받는다. 정의부(Ministry of Justice·법무부) 장관은 대놓고 정의를 유린한다. ‘추미애·조국 사태’는 문 정권이 헌법이 엄금한 초법적인 “사회적 특수 계급을 창설”했음을 보여준다. 무소불위 공수처가 출범하면 문 정권이 누리는 특권은 제도화한다. 무죄를 선고받은 조국 전 장관이나 김경수 지사가 대통령이 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정의가 부재한 국가는 나라라고 할 수조차 없다. 미국에서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추모 열기가 뜨거운 건 그녀가 ‘정의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RBG(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는 소수자와 약자 인권 보호에 평생 헌신했다. 불편한 관계였던 독설가 트럼프 대통령조차 RBG를 ‘법의 거인’으로 기릴 정도다. 긴즈버그 열풍은 민주주의가 흔들리면서 정의에 목마른 미국 사회의 이면을 폭로한다. 인종 갈등, 극단적 빈부 양극화, 리더십 실종, 진영 대결로 찢긴 미국의 현실이 RBG를 정의의 상징으로 불러낸다.

문재인 정권은 소크라테스의 후예가 아니라 트라시마코스의 자식이다. 문재인 연성(軟性) 파시즘의 행동 원리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요설(妖說)이다. 추미애·조국 사태에서 문 정권과 어용 지식인들이 ‘궤변의 향연’에 빠진 본질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혁을 빙자한 문 정권의 특권 추구와 법치 파괴가 한국 사회를 약육강식의 야만으로 몰아간다. 문재인판 트라시마코스의 반동적 공세 앞에 민주공화정이 최대 위기에 빠졌다. 특권 계급을 철폐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도, 정의로운 법치국가도 없다. 보편타당한 정의야말로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대한민국이 공화(共和)의 나라를 절규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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