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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크리틱] 노인과 철학 이야기 / 김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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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영준 l 열린책들 편집이사

솔 나저만은 원래 독일의 철학 교수였다. 유대인인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내와 자식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할렘가에서 전당포를 열고 있는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가게 일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산다. 그런데 걸핏하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동네에 사는 노인인데 물건을 맡기는 건 핑계이고 올 때마다 철학적인 담론을 늘어놓는다. 나저만은 거래와 관계없는 말에는 무표정 무반응으로 일관했지만, 어느 날 쇠창살 창구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보들레르가 등장하는 장광설에 열중한 노인을 처음으로 제지한다. “그만! 잠깐만!” 놀란 노인에게 나저만이 말한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까? 정확하게 여기 뭐 맡기러 온 겁니까?”

불쌍한 노인은 그날 아무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 온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사라진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전당포>(1964)를 어렸을 때 처음 보았다. 우리가 노인을 동정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의 잘못(사람을 조금 귀찮게 한 것)에 비해 받은 모욕이 부당하게 커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저만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그가 수용소 체험 때문에 인간적 감정 대부분을 잃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장면은 잃어버린 쪽이 아니라 남아 있는 감정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주제의 대화를 거절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실로 인간의 평안을 좌우하는 권리인데, 전직 철학 교수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저만이 철학 이야기를 견딜 수 없어 하는 게 그리 큰 잘못은 아닌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아도르노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말이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나저만 같은 이 앞에서 하릴없이 철학을 논하는 것처럼 야만적인 것은 없다고 이해해보면 어떨까.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를 악의 없이 꺼내는 것.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나저만의 호통이 그 점만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저만이 노인에게 여기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고 요구할 때, 그는 노인이 간절히 원하던 직업 철학자의 응답을 베푼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인이 무의미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전당포에 가면서 잡힐 물건조차 챙기지 않으니 말이다. 노인은 대신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 같은 이름들을 담아 와서는 그 이름에 가격표라도 붙어 있다는 듯이 꺼내는 것이다. 나저만이 보기에 그 이름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노인이 전에 가져왔던 2달러짜리 램프보다도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나 보들레르라는 이름의 가치는 쓸모 있는 생각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름들이 생각의 가치를 보증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전기를 보면 벼락같은 한마디로 주변인들의 인생을 혼란에서 구해주는 이야기들이 없지 않다. 나저만과 노인의 우화는 크게 보면 “철학자가 병을 고쳐주는” 이야기들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들여다볼수록 노인의 악의 없는 무례함을 편들어주기가 어려워 보인다. 노인이 나저만의 직업을 이중으로(전당포 주인으로서도 철학자로서도) 존중하지 않고 있는데, 나저만이 노인을 어떻게 존중할까. 우리는 노인이 그 뒤 다른 곳에서도 그토록 갈망하는 인문학을 배우기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름이 지식은 아니고, 착한 말이 선은 아님을 깨닫지 못한다면 말이다. 어떤 종류의 배움은 선생이 학생의 존경을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학생 역시 선생의 존경을 획득해야만 성립이 가능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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