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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매경데스크] 참 기업하기 힘든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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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8년 전 화웨이 출장을 갔을 때다. 중국 선전에 위치한 화웨이 단지 전시관에 들어서자 화웨이의 최신 스마트폰이 눈에 띄었다. 제품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스마트폰'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화웨이 임원은 "5년 안에 세계 톱3 스마트폰 업체가 될 것"이라며 "삼성과 애플이 우리의 경쟁 상대"라고 힘줘 말했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 변방에 있던 화웨이의 배짱이 왠지 거슬렸다. 그리고 화웨이의 호언장담은 현실이 됐다.

화웨이가 중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기업으로 성장하자 미국은 화웨이를 표적으로 삼았다.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듯 고강도 반도체 제재의 칼을 뽑았다. '중국 때리기'로 표심을 얻으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하지만 화웨이의 일방적 패배를 점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국 기업을 적극 옹호하는 중국 정부와 거대 내수시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삼성전자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우리 정부가 방패막이가 돼줄 수 있을지, 해외시장 타격을 만회할 만한 내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무대에서 혈혈단신으로 싸우고 있다.

글로벌 생존 경쟁도 벅찬데 한국에선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기업규제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을 추진하는 것도 모자라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 도입하겠다고 한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성장률이 곤두박질치고 생사 기로에 놓였는데, 한국의 위정자들은 재계의 하소연을 배부른 소리쯤으로 치부한다. 일부 정치인은 '재벌 때리기'를 인기영합 수단으로 삼는다.

이런 규제 폭탄 속에 묘한 기시감이 든다.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추락하고 외국 기업들 배만 불리는 악순환이 재연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기자가 IT 업계를 출입할 때인 2009년 애플 아이폰 3GS가 한국에 상륙했다. 삼성·LG 등 휴대폰 업체는 큰 충격을 받았고 아이폰에 대응할 스마트폰을 내놓는 데 사활을 걸었다. 삼성전자에선 신종균 당시 무선사업부장 등 개발진이 회사에 야전침대를 놓고 몇 달간 밤샘 작업을 강행했다.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갤럭시폰이 탄생했다. 삼성의 반도체나 가전, 디스플레이 사업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일군 기업이 지금의 삼성전자다.

정부와 여당은 기업에 대한 견제 장치가 아직 부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업 경영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규제는 이미 최악의 수준이다. "내가 한국인이고 국적을 바꿀 수도 없으니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토로하는 기업 오너를 여럿 봤다. 정부와 여당이 우리 기업을 망하게 하려는 건 아니라는 최소한의 믿음까지 무너지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얼마 전 만난 외국계 IT 기업 한 임원은 "까다로운 한국 규제로 본사 신제품을 들여오기가 너무 힘들다"며 "어떤 제품은 몇 년씩 걸린다"고 말했다. 한국은 무시하지 못할 시장인데도 제품 출시가 후순위로 밀리는 건 한국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법 규제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외국 기업에도 한국은 '규제 왕국'이다.

대통령 주변에 기업과 산업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참모들은 얼마나 될까. 다음은 문재인정부 청와대에 몸담았던 고위 관료의 증언이다.

"정부는 작년 12월 인공지능(AI) 국가전략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빨리 나왔어야 한다. 재작년 가을에 AI 국가전략 수립의 필요성이 청와대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해당 부처가 방안을 여러 차례 청와대로 올렸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신산업을 이해하는 사람이 청와대 안에 별로 없었던 거다. 담당 공무원이 100번 넘게 안을 고쳤다고 하더라."

기업을 만만하게 보는 공직자들로 둘러싸인 정권이 산업 육성 기반을 제대로 키울 리 없다. 경제를 잘 모르면 기업을 가만 놔두기라도 하면 되는데, 한국의 위정자들은 기업을 좋은 먹잇감으로 삼는 것 같다. 참 기업하기 힘든 나라다.

[황인혁 모바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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