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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트럼프 승부수… 대법관에 ‘뼛속까지 보수’ 7남매 엄마 지명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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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상징’ 긴즈버그 후임으로 ‘낙태·동성애 반대’ 배럿 선택

조선일보

미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가 26일(현지 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있다. 배럿은 이날 “대법관직을 내가 속한 그룹이나 내 개인적 신념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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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낮(현지 시각)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의 한 주택에서 백인 부부가 교회에 가듯 차려입은 어린 남매 일곱을 데리고 걸어나왔다. 5세부터 16세까지의 아이 중 둘은 중미 아이티 출신의 흑인 입양아이고, 다섯 살 막내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부부는 소풍 가듯 재잘대는 아이들과 함께 대통령이 보낸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아이들의 엄마는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48)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였다.

아이들은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트럼프 대통령 부부의 안내로 부모와 함께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배럿 판사를 소개하면서 그의 자녀 스토리를 “감동적”이라고 했다. 또 “배럿이 인준되면 취학 연령 자녀를 둔 첫 엄마 대법관이 될 것”이라고 하자 큰 박수가 터져나왔다. 배럿 판사는 지명 소감을 밝히며 아이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연단에도 올렸다. 다운증후군인 막내가 떼를 쓰며 도망가자, 부모는 웃으며 내버려뒀다. 배럿 본인도 7남매 중 장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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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과 함께 연단에 선 배럿 - 26일(현지 시각) 미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미 연방대법관 지명 행사에서 대법관으로 지명된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오른쪽에서 둘째)가 남편 제시 배럿(맨 왼쪽), 자녀들과 함께 연단에 서 있다. 도널드 트럼프(왼쪽에서 다섯째)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왼쪽에서 넷째) 여사도 함께 연단에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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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긴즈버그 대법관 후임 지명전을 둘러싼 미국 내 격렬한 논란을 잠시 멎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CNN 같은 진보 성향 언론들도 “배럿의 자녀는 진영을 떠나 많은 사람에게 경이로움과 감동을 안겨주는 스토리”라고 했다. 보수 진영에선 배럿을 가리켜 “보수가 바라는 모든 것을 충족하는 후보”라면서, 그가 인준되면 단순한 대법관이 아니라 향후 수십년간 미국 보수 진영의 중심추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까지 내비치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배럿은 노트르담대 로스쿨 교수 시절 “사람의 인생은 잉태 순간부터 시작된다”면서 낙태에 반대하는 논문과 연설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헌법상 총기 소지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에 부정적이며, 오바마케어(전 국민 건강보험 의무가입)는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보수층이 존경했던 고(故)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서기(law clerk)를 지내 ‘스캘리아의 후계자’로 불린다.

배럿의 확고한 보수 이념과 이력을 눈여겨본 트럼프는 그를 2017년 제7연방고법 판사로 발탁했다. 처음부터 대법관 후보로 점찍어놓고 경력을 쌓아준 것이다. 배럿 지명은 불과 5주 남은 트럼프의 재선 가도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평가다. 배럿에 환호한 보수층이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다. 특히 인디애나 같은 중서부 경합주와 가톨릭 표심, 여성 표심을 잡는 데 유리할 전망이다. 트럼프가 이런 효과를 노리고 민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럿을 서둘러 지명한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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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진영에선 여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대모였던 긴즈버그 대법관 후임으로 보수 색깔이 뚜렷한 배럿이 지명되자 “미국 사회를 뒤로 후퇴시킬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배럿 입성 시 대법원 구도가 보수 6명 대 진보 3명이 돼, 상당 기간 보수 우위가 지속될 것이란 점에 절망하고 있다. 미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인데, 배럿의 나이는 48세로 현 대법관 중에서 가장 젊다.

그러나 민주당도 배럿이 버려진 흑인 아이들을 입양했고, 산전 검사에서 막내의 장애를 발견해 낙태를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출산한 데 대해선 경의를 표하는 분위기다. 신념과 생활이 일치하는 인물이란 것이다. 또 배럿은 제7연방고법이 있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와 집을 오가는 동안, 노트르담대 로스쿨 동기인 검사 출신 남편 제시 배럿과 육아·가사를 분담해왔다고 한다.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기 충분한 것이다.

배럿은 이날 ‘반(反)여성적’이라거나 ‘종교 성향이 짙다’는 우려를 불식하려고 했다. 그는 긴즈버그 대법관에 대해 “법조계의 유리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때려부순 분”이라며 “그의 공직 생활은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고 극찬했다. 그의 멘토였던 스캘리아 대법관도 이념을 넘어 긴즈버그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럿은 “대법관직을 내가 속한 그룹이나 내 개인적 신념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 배럿 지명자에 대한 상원 청문회는 10월 12일 시작된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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