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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이슈 미술의 세계

한국 현대서예의 갈 길을 보다…하석 박원규 서예전 '하하옹치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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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JCC아트센터에서, 갑골문·동파문자·광개토대왕비체 등 30여 점 선보여

·자신만의 ‘하하옹수수체’도…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빼어난 조형성

·“서예작품 감동은 필력보다 공부에서…이미지와 메시지 함께 감상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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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하석 박원규가 대규모 개인전 ‘하하옹치언(何何翁치言)’을 JCC아트센터에서 열고 있다. 사진은 동파문자체로 쓴 작품 ‘ 氷草’(빙초·얼음과 풀·부분)다.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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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역시 하석선생이네요….”

한국 현대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하석(何石) 박원규(73)의 개인전을 찾은 이들의 반응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고전과 역사를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해내는 하석의 작품세계, 나아가 한국 현대서예의 갈 길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 시대의 삶과 가치관을 연구와 실험으로 자신만의 필획, 조형미로 담아냈다”고 밝혔다.

하석이 서예전 ‘하하옹치언(何何翁치言)’을 JCC아트센터(서울 창경궁로)에서 열고 있다. 전시명은 작가인 ‘하하옹’이 ‘무심히 하는 말’ 또는 ‘허튼 소리’란 뜻이다. 전시장에는 대작(1200×240㎝) ‘산거지’(山居志·산 속에 은거해 사는 뜻) 등 30여점의 작품이 1~4층에 선보여 그야말로 그의 작품세계와 한국서예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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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의 작품 ‘고也’(고야).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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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작들은 전·예·해·행·초서 등 틀에 박힌 오체를 훌쩍 넘어선다. 3000여년 전의 갑골문체, 문자의 초기형태이자 지금도 중국 나시족이 쓰는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체, 청동기 등에 새겨진 금문체, 칼에서 붓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예술적 구성이 돋보이는 한간체,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광개토대왕비체, 또 이들을 자신의 서체로 녹여낸 ‘하하옹수(신)수체’와 ‘하하옹한글체’ 등이 전시장을 넘실댄다.

특히 다채로운 색이 특징인 동파문자체와 붉은 색의 갑골문체 등이 어우러진 작품들은 조형미가 두드러져 글씨이자 곧 그림이다. 서예가 고리타분하다는 통념을 깬다. ‘읽고 해석하는 서예’와 더불어 ‘보고 느끼는 서예’다. 글씨의 근본인 필획은 곧 그림의 근본이라는 서화동원의 의미를 보여주고, 저명한 현대미술가들이 왜 서예로 화면의 운용, 붓질의 내공을 쌓는지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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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문자체와 갑골문체로 쓴 하석의 작품 ‘舟車’(주거·왼쪽·부분)와 작품 ‘書’(서·오른쪽).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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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문자체로 쓴 작품 ‘氷草’(빙초·얼음과 풀)나 ‘飮酒’(음주), 갑골문체의 배 모양과 바뀌가 달린 수레모양의 동파문자체로 구성돼 배와 수레를 뜻하는 ‘舟車’(주거), 하하옹신수체의 대련인 ‘山雨 野泉’(산우 야천)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고也’(고야)는 소나무 밑에 기대 앉은 사람의 형상이고, ‘書’(서)와 주역의 건괘·곤괘를 쓴 ‘乾坤’(건곤)은 추상화로 다가온다. ‘白雲’(백운·하하옹수수체)이나 ‘亡心’(무심·한간체)은 그저 흑백의 수묵이지만 조형미로 눈길을 잡는다. “쓰고자하는 글귀, 그에 가장 어울리는 서체를 고르고 고른뒤 수십번 써본다. 낙관과의 조화도 생각한다. 모든 것의 조화, 어우러짐이 중요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하석은 “서예작품은 서예가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담은 메시지와 그 뜻을 자신만의 미감으로 표현하는 이미지의 조화”라며 “시각적인 이미지나 글귀의 내용인 메시지 중 어느 하나만 즐길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둘다 감상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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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200㎝, 세로 240㎝에 이르는 대작 ‘산거지’(山居志·산 속에 은거해 사는 뜻)는 역대 서체들을 아우른 자신만의 하하옹수수체로 쓴 작품이다. 5자루의 붓으로 3시간여에 걸쳐 385자를 휘호했다.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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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빙초’ ‘주거’ 등의 작품은 이미지가 두드러지지만 그 속에 담은 작가의 메시지도 가슴에 다가온다. ‘빙초’는 당나라와 송나라의 사이인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살았던 풍도의 시 ‘천도(天道)’ 중 ‘…겨울 가면 얼음은 녹아내리고/봄이 오면 풀은 절로 돋아나거니…’에서 ‘빙’자와 ‘초’자를 따왔다. 작가가 “참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청년을 비롯한 모두에게 겨울의 얼음은 결국 녹고, 봄이 와 풀의 새싹이 돋아나듯 희망을 가지자”는 의미로 썼다. ‘주거’도 풍도의 시 ‘우작(偶作)’에서 고른 글자로 “결국 배와 수레는 어디서든 목적지에 닿게 마련이니 힘을 조금 더 내자”는 의미다. 전시장은 보다 더 인간답게 살기위해선 시공을 초월해 늘 곱씹을 만한 글귀들, 하석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귀한 말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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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의 ‘山雨 野泉’(산우 야천·부분).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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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은 걸림이 없는 자유분방함이 있지만 사실은 작가의 엄격한 절제가 바탕이 돼 더 빛을 낸다. 하석이 붓을 들때 스스로에게 무서우리만치 지키는 기준들이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근거들이기도 하다. “서예는 예술인데, 문자예술이다. 문자는 서로의 약속으로 멋대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근거가 있어야 한다. 법의 노예, 자용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놀기를 추구하지만 방종은 안된다.” 하석은 원전의 근거가 없는 글귀, 자신을 감동시키지 않는 글귀는 쓰지 않는다. 자신이 한번 쓴 글귀나 남들이 쓴 글귀도 피한다. 문체는 같더라도 자신만이 쓸 수있는 필법을 추구한다. 이런 기준을 지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 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하석은 10대에 붓을 잡고 30대 초반에 제1회 동아미술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서단에서 인정받는 한학자이자 전각가이기도 한 그는 강암 송성용과 독옹 이대목(대만), 긍둔 송창, 월당 홍진표, 지산 장재한 등 여러 스승들을 찾아 공부한 것도 유명하다. 60여년 붓을 잡은 그는 지금도 “하루 최소한 3시간”은 쓰고, 여러 운동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제대로 쓰기위해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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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의 개인전 ‘하하옹치언’의 전시 전경 일부. ⓒ도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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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라면 서예작품으로 감동을 줘야한다. 감동을 주자면 필력만이 아니라 얼마나 공부가 돼있느냐, 인문학적 소양과 인격적 수양이 이뤘느냐가 중요하다. 서예가 곧 사람, 성정과 기질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필력은 좋은 스승 만나서 열심히 배우면 되지만 공부는 스스로하는 것이다. 자신과 관람객의 진정한 감동은 얼마나 깊이 넓게 공부했는 가에서 나온다.” 대작 ‘산거지’는 하석의 작품세계, 공부의 깊이와 넓이를 잘 보여준다. 자신의 서실인 서울 압구정동의 ‘석곡실’이 좁아 문방사우 등을 아예 전시장(국제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다)으로 옮겨 5자루의 붓으로 3시간에 걸쳐 385자를 하하옹수수체로 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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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의 광개토대왕비체 작품인 ‘樂天安命’(낙천안명). JCC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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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은 최근 광개토대왕비체를 다시 보고 있다. “쓰면 쓸수록 우리 민족의 DNA가 녹아든 서체라는 생각이 들어 정이 간다. 화려하거나 꾸미지 않아 무뚝뚝하고 투박한데 굳세면서도 정감이 있다. 밥과 같은 서체라고 할까. <훈민정음 해례본>을 볼 때 한글의 모태라는 생각도 든다.” <논어><주역> 등을 근거로 16자로 구성한 ‘樂天安命’(낙천안명), <여씨춘추>의 ‘논인’편에 나오는 말로 ‘한 사람이 빈궁할 때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찰한다’는 뜻인 ‘觀其所不爲’(관기소불위) 등의 작품이 광개토대왕비체다.

한때 추사 김정희 등은 동아시아 문인들의 추앙을 받고, 소전 손재형은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를 극복한 ‘서예’를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서예는 근현대를 지나며 영광도 있었으나 질곡 속을 거닐었다. 지금도 주목받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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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의 개인전 ‘하하옹치언’의 전시 전경 일부. ⓒ도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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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석은 “서예가 보다 많은 이들로 부터 아낌과 사랑을 받자면 서예가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공부하고 붓을 잡는다. 누군가 그에게 “대표작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대답을 한다. “대표작요? 내일 나올려나…”.

전시회는 관람객들 위해 작품을 상세하게 설명한 자료가 준비됐으며, 12월 20일까지 열린다. (02)2138-7373.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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