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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선거판에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독 입이 무거운 매체로 통하다.
대통령선거 한달 여를 앞두고 다른 매체들은 공화당과 민주당 중 선호하는 후보를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해 지지하는 사설을 싣는다.
'미디어 공개지지'(media endorsement)로 불리는 미국 특유의 언론시장 환경에 따라,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는 연달아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 매체들은 2016년 대선 때도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은 1928년 허버트 후버(제31대 대통령·1929~1933년)를 향해 공개지지를 드러낸 후 지금까지 90년 넘게 공개지지를 하지 않고 있다.
대신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사설과 칼럼으로 대선 후보의 경제정책을 분석하고 새 통치기간에 미국 경제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를 조망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WSJ가 다른 매체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사설과 기고문으로 은근하게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례로 WSJ는 18일(현지시간) '바이드노믹스의 비용'이라는 사설에서 미국 싱크탱크인 후버연구소의 분석 보고서를 인용하며 바이드노믹스를 비판했다.
그런데 사설 내용을 보면 시장이 기피하는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바이든 캠프의 증세·규제 공약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톤이라기보다 공약 수정을 촉구하는 조언에 가깝다. 현 공약이 그대로 이행될 경우 미국민들의 삶의 질이 하락할 것이고, 급격한 화석에너지 폐지가 막대한 정부 보조금 투입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그 어떤 매체 보도보다 WSJ 사설이 친절하게 바이든 후보의 경제 관련 공약을 미국민들에게 설명시켜준 셈이다.
뒤이어 19일에는 "나는 바이든에게 투표했다(I voted for Joe Biden.)"는 노골적 표현이 담긴 미국 퇴역장성의 기고가 WSJ에 노출됐다. 기고자는 미국 합동특수전사령관을 지낸 윌리엄 맥레이븐으로 공화당 지지자들을 넘어 미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퇴역장성 중 한 명이다. 네이비실 특수부대 출신인 그는 2011년 5월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냅튠 스피어'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WSJ 기고문에서 최근 자신이 텍사스 조기 투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이제 세계는 더 이상 미국을 우러러보지 않는다.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미국이 세계 문제에 '거래적 접근'을 해왔음을 목도했다. 또 미국이 동맹국을 전장에 남겨두고 홀로 떠나며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지켜봤다. 감염병 대유행과 산불에 대처하는 미국의 무능함도 그들은 목격했다"고 개탄했다.
이런 4년 간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 미국의 리더십 재건을 위해 "나는 바이든에게 투표했다"는 노골적 지지 메시지를 기고문 말미에 실었는데 WSJ가 이 기고문을 과감하게 수용한 것이다.
WSJ는 그간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할 때마다 다른 매체들은 "WSJ가 이례적으로 트럼프를 때렸다(slam)“는 식의 제목으로 기사화할만큼 공화당 지지성향이 확고했다. 4년 전 대선에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이기며 파란을 일으켰을 때도 WSJ의 행보는 남달랐다. 다른 매체들이 승리가 유력한 클린턴 후보에 집중할 때 WSJ는 유세 현장에서 힐러리와 달리 트럼프가 지지자들을 뜨겁게 환호시키는 '열정효과'Enthusiasm Effect)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고 조명했다.
그랬던 WSJ는 올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부터 대선 국면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트럼프 대통령의 기행을 질타하는 사설을 많이 쏟아냈다. 지난 7월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조작을 구실로 11월 3일로 약속된 미국 대선일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당신이 (선거가 조작됐다고) 믿는다면 선거에 참여하지 말고 패배를 탓할 핑계를 찾지 않을 다른 후보자를 뛰게 하라"고 비판했다.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트위터를 통해 측근들을 일방 해고하고 망신을 주며 음모론을 뿌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 혐오스러운 반응도 내비쳤다. 미국 내 코로나19 팬데믹이 본격화한 지난 4월에는 과학의 소리를 배제하고 1인 토크쇼마냥 백악관 코로나19 브리핑을 주도하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시간 낭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전통적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지해온 NYT는 이달 6일 '미국이여, 바이든을 뽑아라'라는 제목의 사설로 바이든 후보의 리더십을 공식 지지했다.
이번 지지 사설은 4년 전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을 당시 제목('힐러리를 대통령으로')과 비교해 '미국이여'가 추가돼 한층 강한 명령형 어조로 제목이 바뀌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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