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출처= 삼성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농담 아니야.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해" 삼성의 모든 것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건희 회장이 주도한 '삼성 신경영'의 시작이다. 삼성 신경영은 전자 등 주요사업부문에서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에게 3류 취급을 받던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전환점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이어진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대, 대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경제의 성장이었던 시대, 삼성은 그 성장의 중심에 위치했고 특히 이건희 회장은 한국경제를 어깨로 떠받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제 78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25일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알렸다. 1942년생인 고인은 지난 2014년 5월 10일 급성심근경색으로 입원했고 6년 동안 투병 끝에 사망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삼남이다.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함으로 경영수업을 받았고 이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중앙일보 이사를 역임했고 그리고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면서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삼성그룹의 경영을 승계 받은 이후 2014년 입원 전까지 약 27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 27년의 기간 동안 삼성의 매출은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으로 커졌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 취임식. 출처=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건희 회장이 경영을 맡은 이후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바이오 등 신사업 분야에 진출했고 이는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일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삼성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지는 반도체의 경우 이건희 회장이 자신의 강한 의지로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의 반대의사를 거슬러가면서 일궈낸 사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판단은 옳았고, 이후 이병철 회장도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즉, 삼성의 반도체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 선구안과 역량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경영을 진두지휘하게 된 직후인 1988년 삼성그룹 창업 50주년 기념식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제 2창업'이 필요함을 부르짖었고 1993년 6월 '신경영'을 통한 획기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를 추구한 근거는 이 회장이 삼성의 현주소를 알고자 일본인 고문인 후쿠다에게 자사를 냉정하게 평가한 '후쿠다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삼성 조직관리의 문제점, 글로벌에서 삼성이라는 브랜드의 위치, 삼성 제품들에 부족한 '디자인' 감각 등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건희 회장은 인간중심·기술중심·자율경영·사회공헌 등의 핵심 가치를 경영의 축으로 삼고 세계 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 신경영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은 삼성 휴대전화 화형식이었다. 불량률이 워낙 높아 고객들로부터 삼성 휴대전화의 브랜드 평판은 점점 나빠졌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약 500억원 상당의 삼성전자 휴대폰 15만대를 불태워 버리는 '독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자신들이 애써 만든 제품들이 불타 없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삼성전자의 임직원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이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이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입지를 만든 큰 계기였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열린 휴대폰 회형식. 출처= 삼성전자 |
이건희 회장은 그룹의 모든 대표들을 모아두고 진행한 회의에서 늘 '위기'라고 강조했다. 반도체와 전자 부문의 폭발적 성장으로 삼성이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이 회장은 "시장 흐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위기에 대비하라"라고 말했다. 실제로 주요 사업에서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지표가 보고되면 "큰일이다. 이거 어떻게 할 거냐. 당장 대책을 마련하라"라고 각 사업부문의 임원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일련의 대응은 모든 면에서 최고를 추구하는 삼성의 DNA가 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도체 산업의 후발주자인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절대적 입지'의 세계 1위 기업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건희 회장이 기대하는 수준을 맞추기 위함이었다는 후일담들도 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본인을 현업에 보내 경영수업을 시켰던 것처럼 이건희 회장도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을 다양한 현업으로 보내 역량을 갈고 닦게 한다. 이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차기 리더로 낙점됐고 자신만의 역량을 입증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늘 각 자회사 현업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고자 했던 이건희 회장의 습관을 이재용 부회장 역시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주요 사업의 운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현장으로 가서 현황을 파악하는, 현재 삼성이 강조하고 있는 '현장 경영'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응급실에 입원한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긴 이 회장은 삼성그룹 계열 의료시설인 서울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된다. 이건희 회장 입원 이후 이재용 부회장은 사실상 삼성의 회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경제에 삼성이 미친 영향력을 고려하면 이건희 회장은 대단한 인물이기는 하나,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는 많은 부분에서 개선이 이뤄졌지만 한동안 삼성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여겨졌던 '무노조 원칙'을 가장 강조한 이가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 외에도 본인의 이미지에 손해를 입는 것은 감수하면서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삼성의 경영권을 넘기기 위해 노력한 것은 재계에서 아직도 호평과 악평이 많이 갈리고 있다. 이로 인해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권 관련해 여러 송사와 엮여있고 현재 사안들과 재판들이 한창 진행 중이다.
한국경제를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을 올린 장본인인 이건희 회장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연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많은 것들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기록들이 됐다.
<저작권자 Copyright ⓒ 이코노믹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