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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건희 별세] "3만불 되면 노조 해도 되지 않나" 생전 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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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 정준명 전 삼성 비서팀장 추도사

독일 아우토반 시속 300km로 달리며

"열 대 앞의 차 흐름까지 봐야 안전"

"퍼팅은 지나쳐야 쓸만한 사람" 농담도

중학교 때 일본식 발음으로 놀림 받아

극복 위해 배운 레슬링이 걸음걸이에 영향

3만불 시대엔 노조해도 되지 않을까 반문도

한때 미달 타워팰리스는 최고의 선호 주거로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 2대에 걸쳐 비서를 지낸 정준명 전 회장 비서팀장(전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이 25일 별세한 이건희 회장 추도사를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이건희 회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한다'라는 제목의 추도사 요약문.

선대 이병철 회장 최고의 선택은 이건희 부회장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고 필자는 말해왔습니다. 두 분의 비서로 오래 근무했던 필자만의 생각일까요? 선대 회장의 이념을 잇고 무한경쟁의 지구촌에서 날마다 도약을 진두지휘하며 깊은 통찰과 고뇌를 거듭하던 회장을 여의고 천붕지통(天崩之痛)의 슬픔에 빠졌습니다. 든든한 말씀을 남기지 않고 침묵하다 떠나시니 삼성 가족 일동은 평소 초격차(超格差)의 지도 말씀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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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병철 삼성 회장(왼쪽)과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집무실에서 서예를 연습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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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미국에 유학하셨기에 일본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일본식 경영시스템과 미국의 실용주의적 합리성, 성과기반 보상시스템을 가미한 삼성 특유의 기업 문화를 구축했습니다. 1974년 도산하게 된 한국반도체를 사재(私財)로 인수하고 선대 회장 추인을 받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해 나중 삼성반도체통신으로 사업체계를 구축하고 그것이 세계 최대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체로 진화, 휴대전화·네트워크 등으로 시장을 선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80년대가 되자 디지털 개념을 역설했는데 우리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휴대전화 등 불량품은 몇억원어치가 되어도 모두 소각처리하도록 하고 책임임원에게 절대권한을 주고 재기를 옹호했습니다.

어눌한 어조로, 주어(主語)도 생략한 채 짧게 태연히 지시하고 대화하는 이 회장의 언급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건 절반도 안 되기 일쑤였고, 이 회장은 사장들을 대체로 파악하고 있으나, 사장들은 이 회장을 절반 정도밖에 어떤 분인지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대로부터 받은 ‘경청(傾聽)’이란 휘호는 뜻깊은 지시였으며, 좌우명이 된 장자(莊子)의 ‘목계(木鷄·나무로 만든 닭처럼 상대가 아무리 도발해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보기만 해도 상대가 달아날 정도로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싸움닭)’는 이 회장을 비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업이 커가며 진통도 시련도 있곤 했는데, 부정적 시각들이 이 회장을 이해하려면 서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입니다. 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아우토반)에서 시속 300㎞ 이상 주파하기도 하고, 열 대 앞의 차 움직임을 보아야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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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비즈니스위크 표지에 실린 이건희 회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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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즐기셨는데 퍼팅이 홀 컵에 미달하는 것은 소심하다고 했고, 지나가는 사람이 쓸만하다고 농담하셨습니다. 연습장에서 수백 개씩 치면서 하지 근육 염증을 유발해 수술까지 하였고, 도쿄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던 관계로 중학교 때 우리말 발음 때문에 놀림을 당해 이를 극복하기 위해 험한 레슬링을 하였는데 그로 인해 걸음걸이에 영향을 미쳐 시중에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임원들에게 골프·스키·승마를 장려했는데, 이를 통해 국제사회에 나가 자신을 가지게 했습니다. 단체든, 회사든, 나라든 그 리더의 그릇보다 커지지 못한다고 임직원의 그릇을 키우는 문제에 전념했습니다. 임직원들이 경쟁국의 동일 직위와 대비해 그들보다 월등하지 않으면 지게 된다고 실력 양성에 투자했습니다. 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해 세계 굴지의 인재개발원을 용인 골짜기에 신축했습니다.

선대 회장의 인재중시를 이어받아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고, 사람을 쓸 바엔 의심하지 말라)'과 '지행용훈평(知行用訓評·아는 것과 할 줄 아는 것과 시킬 줄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평가하는 것)'의 차이와 기능을 강조했습니다. 품질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품위경영, 브랜드가치, 속도경영, 신상필벌, 지역전문가과정, 패자부활전, 쓰리 스트라이크아웃 제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국제경기 유치와 스폰서, 해커의 채용, 7전 8기에 대한 이해를 균형 있게 구사했습니다.

복지는 파격적이었으며 임직원의 생활불안을 해결하는 문제도 관심사였습니다. 사장단들에게 달동네를 가보도록 하고 탁아소, 보육사업, 월동지원, 위생시설개선과 장학사업에 남다른 규모의 후원을 했습니다. 기업문화를 확립하며 도덕성이 결여된 기업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 수 없고 나와도 반갑지 않다고 했습니다. 초일류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예견하고 특급 인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노조문제는 3만불 시대엔 용인해도 되지 않을까 자주 반문했었습니다. 타워팰리스 등 임직원 공동 아파트를 구상해 초기엔 미달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나 선호하는 주거지가 되게 했습니다.

새벽에 가끔 필자에게 전화 주시면 당시엔 어느 나라에서 거는지 잘 모르고 받았었습니다. 한밤중 2~3시가 보통이었는데, “할 일이 아주 많은데 잠만 자면 어떡하나! 그 나이에 남하고 똑같이 자면 경쟁사를 어떻게 이기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4시간인데 내 마음대로 쓸 시간은 잠자는 시간밖에 없다“로 시작하는 다채로운 지시와 의논에 전화기 옆엔 항상 메모 노트와 2색 이상의 볼펜을 준비하곤 했었습니다. 어떤 땐 100분 정도로 통화하여 메모 노트가 모자라 종이를 마련하고 다시 통화를 계속하면 평소 준비가 부족하다고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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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한남동 자택 집무실 모습. 오디오 매니어로 유명했던 이 회장은 집무실에도 영국 B&W 스피커와 매킨토시 앰프를 구비해뒀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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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떤 기업 회장과 점심 경매에 몇만, 몇십만 달러를 낸다는 기사가 종종 화제이지만, 필자는 삼성 재직 중 이 회장과 점심,저녁 합해 아마 2000번 이상 같이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 재직 중 특히 90년대 10여 년간은 호텔 방에서 몇 십 번이고 이 회장과 단둘이 밤을 새곤 하였습니다.

일본 출장 때엔 영화관에 틈틈이 함께 관람하곤 했는데, 옆에서 뵈면 잠든 듯 하였어도 영화 줄거리와 주인공 동작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우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회장은 댁에서나 해외 출장 중 정말 매일 쉬지 않고 철야하며 보고서는 물론 전문서적, 전문잡지, 다큐멘터리 비디오와 DVD시청, 영화광으로서의 영화분석, 세계를 움직인 인물에 대한 공부, 전자·자동차·기계·화학·금융·서비스·유통 등 그룹 영위 사업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VHS VTR 제조사업 초기인데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출장 중 갑자기 담당 임원을 불러 뚜껑을 열고 부품 하나하나의 위치와 기능을 질문하였는데, 그 사업담당이며 관리 출신인 그가 답변을 제대로 못 하자 모든 임원들이 경쟁사 제품을 뜯어서 비교 분석하게 했습니다. 기술을 잘 모르면 우선 제품을 저울에 달아보고 가볍게 만들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려면 부품 수를 줄이고 회로를 모듈화하는 등 강구해야 했는데 결국 VTR사업은 시장 점유를 확대해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반도체 사업에 착목하여 경영위기의 한국반도체를 개인 자금으로 과감히 인수해 기반을 마련한 후 메모리 사업을 무모하리만치 강력 추진하였으며, 반도체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대비했으며, 통신의 미래를 중시해 반대를 무릅쓰고 교환기 사업 등에 몰입해 오늘날 갤럭시 스마트폰 제조의 기틀을 이루게 했습니다. 특히 반도체 제조공정 기술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스택(Stack) 방식을 지시하셔서 오늘의 삼성반도체의 역량을 확고히 하신 일은 혜안이었습니다.

생활은 검소하여 의외로 모시기 쉬웠는데, 이는 도쿄 유학시절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익숙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대 회장 모시던 비서실장을 그대로 두고 3년상을 지내고 나서 실장을 바꾸었는데 사장단 재배치를 생각하고 몇 달을 심사숙고하여, 1993년 2월 비서팀장인 필자는 회장과 LA 출장 중으로 매일 밤 많은 현안을 정리 중일 때, 서울에 연락해 전자 임원들을 대거 불러 LA의 가전판매장들에서 제값도 못 받는 제품, 전시대 밑바닥에서 천대받는 제품을 돌아보게 하고 불 같은 호령을 내려 대책을 엄명한 일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것이 ‘신경영’의 단초라고 생각합니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신경영’)을 시작으로 전 임원을 대상으로 제2 창업의 의지를 주입하는 구술교육이 강화되면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라는 개혁을 주문했습니다. 그 해는 그룹 창업 55주년이기도 하여 타성에 빠지고 전례를 중시하는 삼성병을 그렇게 고쳐 나아갔습니다.

‘업의 개념’이란 생소한 해설을 듣고 모두 긴장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임직원들을 걱정했습니다.

“삼고초려를 오고초려로 고쳐서라도 우수인재를 구하라”

“일석이조로는 부족하다, 일석오조(1石5鳥)라야 만족할 수 있다”

“댐을 쌓는 데 최고 수위는 제일 낮은 방벽이다.”

“미꾸라지 양식장의 메기 한 마리의 역할”, 또 재미있고도 조직 긴장되는 말씀이 많았습니다.

제2 창업선언의 가시화는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도입으로도 유명합니다.

”순이익이 조 단위의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고 탁상공론을 배격하고 사업집중에 주력했습니다. 그룹 로고와 사가(社歌)의 변경, 놀라운 발상과 투지, 지시와 토의, 새 시대·신기술의 사고방식, 해외 우수인력 스카우트, 투자안배, 임원 재배치, 급여 등 처우제도 혁신, 스톡옵션제도 도입, 등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습니다.

거짓말과 버르장머리 나쁜 사람, 배알이 없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으며, 크고 작은 배신행위에 불쾌해했습니다. 매너와 에티켓에 대해 임직원 교육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유학과 생활이 길어 일본 이상으로 우리나라가 잘 살길을 이해하고 삼성의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마케팅 전략과 기술혁신에 과감한 투자를 했고 일본의 유명선진기업들을 따돌렸습니다.

이 회장은 일본에서 초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며 차별과 하대를 당한 날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국민 프라이드와 국가품위를 올리는 일에 기업인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장단점을 설파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자연스러운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기 능력과 역할을 키워 나아가면 확립되는 일이니 우선 생산과 수출에 전념하기를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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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미국 뉴욕 케네디공항의 푸시카트에 삼성전자 광고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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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리려면, 국제사회에서 행동하여 인정받아야 한다, 부를 키우지 않고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며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세계로 팔아야 한다며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과 마케팅전략의 현지화”를 강조했습니다.

도쿄를 필두로 세계 주요 공항에 삼성을 광고하는 카트를 수 백대 배치하게 하여 점차 삼성이란 회사를 막연히 알게 만들고 상품으로 고객을 확보해 나아가게 했습니다. 심지어 삼성은 공항용 카트를 제조하는 회사란 농담도 들었을 정도입니다.

칠십 평생을 스스로를 긴장하게 하시며 하루하루를 빈틈없이 지내시기에 누적된 심신의 피로를 몇 해 떨쳐내셨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꽃길로 하늘에 오르십시오.

이 회장의 “일하고 일하고 또 열심히 일해라”란 말씀이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Be alert!)는 말씀으로 성경을 인용해 등불을 발아래 두지 말도록 강조했습니다. 하늘나라보다 사면초가인 우리나라에서 하실 일이 태산 같은데 홀연히 떠나십니까?

사상 최고의 기록적 성과를 냈음에도 아직 배고프다고 하시며 오늘보다 내일을 위해 함께 뛰자고 격려해주시던 음성이 여전히 쟁쟁합니다.

이제 세상은 조용히 평가를 하게 되겠지만, 글로벌 구상과 목표를 차질없이 후대들이 이끌며, 의논드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슬픔을 가누고 다시 뵈올 날을 기다리며 삼가 영전에 고개 숙입니다.

2020년 10월 정준명(鄭埈明) 전 삼성전자 일본본사 사장, 전 회장 비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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