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
2020년 10월 29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씨가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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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28)에게 지난 반년은 “살면서 가장 멍 때린 날들”로 요약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대를 나와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을 단번에 꿰찼다. 그는 ‘포커를 처음 해본 숙맥이 얼떨결에 터뜨린 잭팟’이라 했다. 지휘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2년부터 음악감독으로 있는 450년 역사의 독일 명문 오케스트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국립오페라)에 최초의 동양인·여성·최연소 악장으로 뽑힌 까닭이다. 2018년 5월 단원들 만장일치로 종신 악장이 됐고, 지난해 6월엔 이 악단의 가장 큰 여름 이벤트에 솔로로 발탁돼 관객 4만5000명 앞에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베를린은 명문 오케스트라만 5~6개, 오페라 하우스도 3개나 있는 음악 도시여서 1년 내내 라이브 공연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친 3월부터 그는 6개월을 “백수처럼” 지냈다. 매일 밤 11시는 돼야 끝나는 공연, 다음 날 오전 10시면 어김없이 연습실에 나가 악기를 쥔 그였지만 아침에 눈떠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처음엔 쏟아지는 시간을 만끽했다. 다음엔 딴 길을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체스를 좋아하니 이제라도 열심히 해서 프로 선수가 돼 볼까? 장난삼아 2.5유로짜리 복권도 사 봤죠.” 근원적 질문도 피어올랐다. “이 세상에서 음악이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가 음악을 하지 않는다면, 지구라는 행성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지난 달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지윤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가 “거대한 산맥같다”고 했다. “아직도 열심히 오르는 중인데요, 미끄러질 때도 있고, 잠시 멈출 때도 있지만 옆에서 손잡아주는 동료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요.”그의 바이올린은 1770년에 제작된‘란돌피’다. /김지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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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8시 서울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열리는 이지윤의 독주회 ‘모험과 환상(Adventure&Fantasy)’은 바로 그 자문에 선물처럼 내놓는 자답이다. 6월 어느 날 그는 비올라⋅첼로⋅오보에 동료 세 명과 함께 아파트 주민들이 공동으로 쓰는 정원에서 ‘발코니 콘서트’를 열었다. 꿈꾸는 듯한 브리튼 판타지와 도흐나니 세레나데를 30분가량 연주했다. 발코니에서 연주를 듣던 주민들은 눈물을 쏟았다. 그도 뭉클했다. “사람들이 제 연주를 얼마나 즐기는지 알게 됐어요. 쩍쩍 갈라져 있던 심장에 비로소 피가 돌고 숨이 쉬어지는 듯한 기쁨! 사실 전쟁이 나거나 바이러스가 퍼지면 제일 먼저 끊기는 게 문화, 그중에서도 음악이잖아요? 흔하니까 귀한 걸 모르다가 잃어버리고야 그 가치를 깨닫는 거죠.”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가 ‘450세 생일’을 자축하려고 지난 9월 제작한 단편영화 ‘음악 없인 살 수 없어(No World without Music)’에도 이지윤은 첫 장면에 얼굴을 내민다. 촬영 때 그가 발코니 콘서트의 감동을 되새기며 한 말이 제목으로 뽑혔다. 악단에는 40년 넘게 근속한 단원도 열 명이 넘는다. 또 다른 악장인 로타 슈트라우스는 정년이 7년밖에 안 남았다. 까마득한 선배 연주자들을 ‘리더’로서 이끌어야 하는 이지윤이 필살기로 삼은 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뚝심”이었다. “처음엔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죠. 그렇지만 잘 모르겠을 땐 솔직히 모른다고 밝히고 가르쳐달라고 청했어요. 그러자 그들이 더 반겼어요.”
‘2020 금호아트홀 상주 음악가’이기도 한 그가 선보일 프로그램은 버르토크의 랩소디와 메시앙의 주제와 변주,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등이다. 이지윤은 “쉽지 않은 곡들이라 살짝 겁도 나지만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무한한 에너지를 준다”며 “그 밤을 맘껏 즐기고 싶다”고 했다.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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