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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일사일언] 내리막길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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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한결 보드라워진 가을날. 글쓰기 수업 시간에 이런 글을 만났다. ‘여름이 농구 골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가을은 노란 햇빛을 타고 온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시현이 글 속에서 노란색 가을이 보인다” 말했더니 아이가 발그레 웃음 지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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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니 시현이가 슬그머니 공책을 내밀었다. 가끔 혼자 글을 쓰는데 선생님이 좋아할 것 같아 가져왔다며 수줍은 눈으로 내 표정을 살폈다. 어느 날은 이런 글을 만났다. ‘피아노는 겸손하다. 손가락 아래로 낮아지면서 소리를 만드니까.’ 공책을 펼칠 때마다 나지막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이들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동안 무심코 넘겼던 공책 한 장, 일기 한 편이 달리 보였다.

자전거를 처음 타기 시작했을 때 ‘세상에 자전거 타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전엔 힘차게 걷기만 해서 자전거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니 길가에 세운 자전거도 무슨 종류인가 궁금해서 눈여겨보고 앞에서 달리는 사람의 헬멧 모양도 유심히 살펴보게 됐다.

교실에서도 그랬다. 아이가 무심코 내뱉은 말과 끄적인 글을 로운 눈으로 들여다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살아 있는 글을 만날 때면 자전거를 타다가 내리막길을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페달에서 발을 떼고 내리막길을 내달릴 때처럼 시원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기쁨을 맛보고 난 뒤 나는 골치 아픈 업무와 학기 말 성적 처리도 즐겁게 했다. 고된 일을 만나도, 허벅지 근육에 알이 배도록 오르막길을 오르면 곧 내리막길이 나오리라 기대할 수 있었다. 힘껏 페달 밟아 언덕을 오르면 어김없이 또 내리막길이 나오니까. 거기선 애써 페달을 밟지 않아도 주르르 비탈길을 타고 내려오며 청량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이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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