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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군수공장에 묻힌 친구들…일본 ‘미안하다’ 한마디면 원이 없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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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한겨레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뿌듯하고 기분이 좋지요. 아흔두 살이나 묵어갖고 내 책이 나온 게 헛세상은 안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이하 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됐던 양금덕(92) 할머니는 19일 “시민들이 기억해준께 고맙다”고 말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최근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꿈틀)라는 제목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 할머니의 ‘자서전’을 냈다. 양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구술한 것을 시민모임이 175쪽짜리 책으로 정리했다.

함께하는시민모임 구술 자서전 진행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 펴내

“헛세상 안 살았다는 생각에 뿌듯”


중학교 보내준다 속이고 ‘협박’까지

미쓰비시중공업 ‘임금’ 약속도 거짓

2018년 ‘승소’에도 사죄·배상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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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기억의 책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 표지. 꿈틀 제공


전남 나주 출신 양 할머니는 1944년 5월 “중학교에 진학시켜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일본행’에 손을 들었다. 공부와 운동을 잘해 ‘급장’을 도맡았던 그는 일본에 가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양 할머니는 다음날 “가지 않겠다”고 담임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명을 받고도 가지 않겠다고 하면 아버지, 어머니를 경찰서에 잡아 가두겠다”는 담임 교사의 말을 듣고 무서웠던 그는 “선반에서 아버지의 도장을 몰래 꺼내 담임 교사에게 건넸다”고 적었다.

그렇게 양 할머니는 근로정신대 대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1944~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무렵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에 있는 3곳의 군수공장으로 동원했던 13~15살 미성년 여성들을 말한다. 호남(138명)·충청(150명) 지역의 미성년 여성 288명이 끌려갔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된 양 할머니는 1944년 12월7일 ‘도난카이 대지진’을 공장에서 겪었다. 불과 10분 사이에 삶과 죽음이 갈렸다. “쉬는 시간 10분 먼저 들어갔던 나주 선배인 최정례와 동기였던 김향남이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그 자리에서 죽었”던 사건은 평생 트라우마가 됐다. 그때 지진으로 광주·전남 출신 10대 소녀 6명이 세상을 떴다. 무너진 벽 틈에 갇혀 목숨을 구했던 양 할머니는 “그때 왼쪽 어깨를 다쳐 지금까지도 후유증이 있다”고 했다. 해방된 뒤 1945년 10월 가까스로 고향에 돌아올 때까지 그는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중노동을 하고도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너희들의 고향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월급을 보내주겠다’는 일본인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귀국한 뒤에는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됐다. 주변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갔다 왔다고 오해하면서 양 할머니는 오가던 혼담마저 깨졌다. 생존 귀환자 중 상당수는 정신대라는 명칭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받아 이혼 등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나마 둘째 언니의 소개로 만난 남편 역시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위안부’로 오해해 딴살림을 차렸다. “10년 만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남자아이 셋을 데리고 돌아온 남편”은 곧 세상을 떴다. 광주로 옮겨와 조기를 떼어다 대인시장에 가서 팔았던 양 할머니는 “지금도 누구보다 예쁘게 조기를 새끼줄로 엮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지경이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 6남매를 공부와 결혼을 시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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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4일 광주지법 204호 법정에서 열린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참여한 양금덕 할머니(오른쪽 둘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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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한 것은 1992년께였다. 이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그뒤 다카하시 마코토라는 일본 사람이 ‘미쓰비시 공장으로 강제동원된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내내 숨기고 살았던 강제동원 사실을 밝혔다. 1999년 3월 일본 재판부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으나 모두 패소하자 2012년 광주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마침내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지만, 여전히 일본 정부의 방해 탓에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양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받으면 원이 없겄오. ‘미안하고, 여생 건강하시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인디,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는 “사죄와 배상을 받을 때까지 양심있는 일본 사람들과 끝까지 싸우고 싶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가 역사를 보는 시선은 늘 낙천적이다. “일본 정부가 사죄의 말을 안 해도, 광주 시민들과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역사 이야기’를 듣고 ‘건강하시라’며 위로해주니께 힘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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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정주 자매 기억의 책 ‘마르지 않는 눈물’ 표지. 꿈틀 제공


시민모임은 또 다른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김성주(92)·김정주(90) 자매 할머니의 삶을 담은 자서전 <마르지 않는 눈물>도 냈다. 김성주 할머니는 순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6월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갔다. 동생 김정주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1945년 2월 국민학교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 일본 후지코시로 끌려갔다. 김정주 할머니가 후지코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2019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해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자서전 2권의 발간비 1천만원은 아름다운재단과 ‘카카오같이가치’가 진행한 온라인 모금 운동을 통해 564명의 직접 기부와 9384명의 참여기부로 마련했다. 일본 시민단체 ‘나고야소송지원회’도 30만엔(한화 316만원)을 보탰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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