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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수건은 젖고…’ 천수호 “오고 또 갔다고 했지만 그곳이란 원래 없는 것”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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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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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다, 라는 말에 들어앉아 있는/ 저 곰 한 마리를 쫓아낼 순 없나/ 일어서지도 걷지도 않고 웅크린 채/ 기어가는 건지 걸어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족속의 행동에 총구를 겨눈다/ 총을 모르는 이놈은/ 한 손으로 슬쩍 밀어낼 뿐 도대체 긴장하지 않는다/ 발 앞에 떨어진 불발탄을 내려다보며/ 울지도 놀라지도 않는다/ 속이 다 삭아서 뼈도 없는,/ 큰 입만 한번 벌렸다 닫는 저 곰”(‘권태’ 전문)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 ‘곰삭다’에서 앞자리를 차지한 ‘곰’이란 말을 모티브로 재미있게 풀어낸 시처럼, 언어에 대한 독특한 감각과 사물을 보는 낯선 시선으로 주목을 받아온 천수호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문학동네)를 상재했다.

첫 번째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에서는 시적 언어를 통해 세계의 모습을 시각화하고 두 번째 시집 ‘우울은 허밍’에서 ‘청각’을 통해 사물과의 소통을 시화(詩化)했다면, 67편의 시가 담긴 이번 시집에선 가까운 이들의 병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관계라거나 슬픔, 의미 등을 그렸다.

“검정고무신을 꽃신으로 만들던 언니”(‘송도’)부터 시작해 “병명에 떠밀려 졸아드는 엄마”(‘시한부’), ‘진영’이라는 “죽은 친구의 이름자”(‘두 글자의 이름은 잠망경처럼’), “한 죽음을 애도하는 낮은 위로의 목소리”(‘와서 가져가라’), “그녀가 그 옆 동네에 묻혔다”(‘여주’) 등 다양한 ‘죽음’과 ‘병’이 시집의 주조(主潮)를 이루지만, 그럼에도 고통이라든가 눈물이라든가 슬픔만이 전부가 아니다. 가령 쉰에 죽은 친구의 2주기에 그녀가 묻힌 곳에 찾았다가 화해와 사랑을 확인하는 다음의 시를 읽어보라.

“갓 쉰이 되어 소나무 아래 묻힌 친구/ 삼 년 투병하면서 온갖 원망을 남편에게 다 쏟아붓는 것이었는데/ 그 남편은 별별 소리를 다 듣고도 무심한 법조인이었는데/ 친구는 그의 무덤덤함이 무덤같이 끔찍하다고/ 그리움도 외로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푸념처럼 넋두리하곤 했었는데/ 그 친구, 어느덧 2주기라/ 모처럼 그 소나무 찾아갔더니/ 아름드리 그 나무 아랫도리에/ 친구 남편의 벨트가 단단히 묶여 있다/ 이 세상일을/ 다 모르고 떠나는 일이 얼마나 다행인가/ 혼자 중얼거렸는데/ 소나무는 제 허리춤의 벨트가/ 이미 오래 묵은 제 몸의 것이라는 듯/ 딱 맞는 품으로 편안히도 당겨 끼고 있었다”(‘벨트 우체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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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특히 죽음과 애도 등을 어떤 물리적인 거리나 공간 등으로 환산해 부단히 실체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원근법에 충실한 묘사보다는 사물의 질감이나 순간적인 느낌, 우연적인 조합이 만들어내는 미학에 오히려 주목하는 듯하다.

“...당신이 손을 뻗어 저 산의 뒤쪽을 얘기할 때 나는/ 몸속 파도가 퍼붓던 애초의 격정과/ 나지막한 봉분의 속삭임을 뒤섞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떠났다//오고 또 갔다고 했지만 그곳이란 원래 없는 것/ 파도가 풀어내는 바다// 당신이 다시 온다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에서)

일상의 물건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상투적인 서정을 답습하지 않는 것은 미덕. 어느 댄스 연습실 의자 위에 걸쳐 있는 한 장의 수건은 그의 눈에, 가슴에 천둥처럼 박힌다. “의자 위에 수건 한 장이 걸쳐 있다...// 수건이 닦고 지나간 눈이며 입이며 귀가 침묵을 학습한 것처럼 저 수건이 품고 간 알몸과 맨발이 비밀을 훈련한 것처럼 젖는 것을 전수받는 오랜 습관처럼 숭고한 침묵을 주무르며 손을 닦는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거울아 거울아’에서)

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도 한동안 서울과 양평을 오갔다며 “아픈 사람들이 서울에서 양평으로 건너가는 것은 칠흑의 한밤중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언니의 안녕을 기원했다. 경북 경산 출신인 그는 명지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가 당선돼 등단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를 건져 올리기 위해 도래하는 풍경을 찬찬히 응시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을 지도, 그것이 창이든 아니든. 그러니 다들 침묵할지니.

“밤열차의 차창 위에/ 내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차창의 유리가 내 얼굴에 골몰할 동안/ 옆 좌석의 그의 얼굴은 내 얼굴의 심연이 된다/ 깊은 곳을 눌러보는 창의 힘으로/ 어둠은 차창에 바짝 동공을 들이댄다/ 반사면 깊숙이 박히는 외눈/ 열차는 한쪽 눈을 밀어내고/ 심연의 다른 쪽 눈을 뜨게 한다/ 그 검은 수면에 떠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는 통로 옆 여인에게/ 나는 바탕 종이처럼 얼굴을 헌사한다”(‘차창의 유리가 내 얼굴에’에서)(2021.1.27)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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