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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이슈 [연재] 뉴스1 '통신One'

[통신One] 스위스 '바퀴달린 스튜디오' 카라반FM엔 저마다의 사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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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마을 '자연인'부터 요양원 할머니까지

작은 나라 구석구석 찾아가며 사람들과 만나

뉴스1

스위스 RTS 카라반(Caravan) FM 방송 화면 갈무리. © 신정숙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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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에르=뉴스1) 신정숙 통신원 = 바퀴 달린 집이 제주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멈춘다. 그곳에서 집주인들은 친구들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밤새도록 얘기를 나눈다. 작은 집, 카라반은 기동성있게 우리가 평소에 가고 싶어하는 곳을 찾아가, 우리가 그곳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며, 대리만족을 준다. 일년 넘게 발이 묶인 우리는 지금도 여행을 떠나고 싶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세상을 더 알고 싶어한다.

스위스의 대표 방송사인 RTS에서 방영되는 다큐 프로그램, 카라반(caravane) FM은 두 명의 진행자, 리오넬 프레사드와 장 프랑수아 미슐레가 작은 버스를 타고 스위스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의 버스는 방송할 장소에 도착하면 카라반으로 변신, 바퀴 달린 집이 아닌 '바퀴 달린 스튜디오'가 된다.

카라반 스튜디오가 설치되면 리오넬과 장 프랑수아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라디오를 건네준다. 이들은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출연자들을 섭외하고 다음 날 스튜디오에 초대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출연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들의 방송은 바로 이 라디오를 통해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샤모니 트래킹 중에 거쳐가는 스위스 산골의 작은 마을 중 하나인 트리앙(trient). 여름에만 이곳에 와서 머문다는 팔순의 할아버지는 점점 녹아 없어지는 빙하를 바라보며 20년 후엔 이 마을의 빙하도 사라질 거라고 안타까워한다. 젊은 시절부터 겪은 심한 알코올중독으로 지금까지 고통을 받는 자신의 아프고 부끄러운 과거도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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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알프스에서 트리앙 빙하가 보인다. © 로이터=뉴스1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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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주민은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들고 스튜디오를 찾아와 두 진행자와 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직접 쓴 시 한 편을 들고 온 청년은 작은 산골 마을이라 또래의 여자들이 도시로 떠나 연애가 쉽지 않다며 수줍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렇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카라반 스튜디오를 떠나면서 미리 골라온 노래를 사연과 함께 신청한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이틀 동안 사람들은 일하는 사무실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주방에서, 가족과 함께 소파에 앉아서 또는 혼자 자기 방에서 가족 또는 이웃이 직접 출연해서 들려주는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그들의 음성으로 생생하게 듣는다.

두 진행자는 카라반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진행을 다시 이어간다. 접고 펼 수 있는 카라반은 이틀간의 라디오 진행이 끝나면 달리는 자동차로 변신해 마을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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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프로그램은 듣는 방송의 전형이었지만, 이제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스위스 RTS 카라반(Caravan) FM 방송 화면 갈무리. © 신정숙 통신원


요즘은 라디오도 볼 수 있는 시대인데 안테나가 달린 라디오를 통해 같은 공간에 살아도 무심하게 흘려버렸거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가 즐겁고 기쁠 수도 있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픔이고 슬픔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나누고 상처를 용기 있게 드러내는 것은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과 티브이를 통해 라디오를 보는 이들에게는 따뜻한 선물과도 같다.

실제로 라디오 방송은 이틀이지만 티브이 프로그램을 위한 준비과정까지 보름 정도 걸리고, 작은 시골 마을뿐만 아니라 도심에 있는 요양원, 양로원, 병원, 동물원 등 작은 나라 스위스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코로나 사태로 지금은 사람들을 카라반 안으로 초대하지 않고 밖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거리를 두고 진행하고 있고, 작년 12월 크리스마스 특집 이후 지금까지 휴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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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 Beau Site에 거주하고 있는 할머니. 스위스 RTS 카라반(Caravan) FM 방송 화면 갈무리. © 신정숙 통신원


한 할머니가 스튜디오에 앉자마자 옆에 있던 진행자가 묻는다.

"무슨 향수 쓰세요? 향기가 너무 좋아요."
"쁘아종. 난 향수를 뿌리고 화장하는 걸 좋아해요. 이렇게 나이가 들어도 꾸미는 걸 좋아하죠."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예쁘게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가 없어 요양원에 들어오게 됐고 아마도 여기서 생을 마감할 거라며 웃는다.

자신의 인생이 이 공간에서 끝날 거라며 담담하게 말하는 할머니. 오늘이 마지막 하루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할머니는 연분홍 섀도우에 연분홍 립스틱를 바르고 쁘아종 향수도 은은하게 뿌렸다. 시종일관 웃음과 유머도 잊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노래 한 곡을 신청했다.

만약 한국의 할머니였다면 이 노래를 신청하지 않았을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흩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백설희 '봄날은 간다' 中)
sagadawa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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