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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국 최초 순교자 유해 발견 없던 일 될 뻔…김성봉 신부에게 들은 발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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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유해 발견’은 없던 일이 될 뻔했다. 유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고비를 넘겼다. 비종교인 표현으로 “운이 좋았다.” 우연에 필연도 작용한 듯도 하다. 천주교인들은 이 발견을 두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

한국 최초 순교자로 기록된 윤지충과 권상연, 신유박해 순교자 윤지헌의 유해는 지난 3월11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바우배기에서 발견됐다. 마을 사람들이 ‘천주교 묫동(묘를 뜻하는 전북 지역 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 일대는 1914년 전주 치명자산 성지로 옮겨가기 전 ‘호남의 사도’ 유항검 가족의 원 묘지터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 순교자가 묻혔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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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 복자 가족 원 묘지터가 있던 바우배기엔 십자고상만 설치됐다. 이곳에서 3인의 순교자 유해가 발견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진은 발굴작업이 진행되기 전 바우배기 일대 모습. 지금은 폐쇄돼 들어갈 수 없다. 유해는 초남이성지 ‘한국 최초 순교자 묘소’로 옮겼다. 전주교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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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글로도, 말로도 그 누구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혔을 가능성을 언급한 게 없어요. 천주교 묘지라 하는 곳에 십자고상만 설치했죠. 이장업체에게 봉분만 있으니 ‘편하게 작업하시라’고 했죠.” 이달 초 만난 초남이성지 담당 김성봉 신부의 말이다.

이장업체 직원 중 한명이 천주교 신자였다. 김 신부는 “(이 직원이) 바우배기 일대가 천주교 성지라는 걸 알고 다른 곳보다 훨씬 주의를 더 기울여서 작업했다”고 한다. 10호부터 역순으로 발굴을 진행했다. 마침 이 10호에서 유해가 나왔다. “10호에서 유해가 안 나왔다면 작업을 더 편하게, 쉽게 했겠죠. 우리 말과 달리 유해들이 나오니 그분들이 다른 무덤들도 더 조심해 하신 덕분에 모양 하나도 깨트리지 않았던 거예요.”

백자사발지석을 두고 한 말이다. 작업 과정에서 백자사발지석이 깨지거나, 흙과 함께 버려졌다면 순교자 유해 확인이 어려웠을 수 있다. 윤지충 묘에서 유해와 함께 나온 백자사발지석엔 ‘聖名 保祿’이라는 한자가 새겨졌다. 성명(聖名)은 세례명, 보록(保祿)은 바오로를 뜻한다. 김 신부는 천주교 관련 한자 표기를 잘 알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순교자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옛날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어르신의 것이라고 봤죠. 왜 그릇(백자사발지석)까지 놓고 안장했을까 궁금증은 들었어요. 옆에 이름도 나왔는데 제가 아는 윤지충 어르신 한자와 같은 거예요. 본을 봤더니 해남이에요. 다 맞으니까, 이분이 어쩌다가 여기서 나오지 했어요. ‘와’가 아니라 ‘왜’였지요.”

천주교에서는 윤지충 유해가 고향인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묻혔으리라 추정했다. 김 신부는 “대전교구가 지난해 이 일대 몇몇 무덤에 발굴 작업을 진행했는데, DNA 검사 결과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신부는 3월11일 백자사발지석을 확인하고 바로 천주교 전주교구장인 김선태 주교에게 알렸다. 호남교회사연구소와 순교자 유해 확인 작업을 오랫동안 진행한 김진소 신부가 당일 현장으로 와 백자사발지석을 다시 판독했다. “김진소 신부님이 해독하더니 묘 주인이 윤지충 복자인 게 99.9%라고 하시더라”고 했다.

당시 바로 발표해도 될 법했다. 문화재 발굴 때 백자사발지석의 명문 같은 명확한 물증이 나오면, 곧 밝히곤 한다.

“김선태 주교님이 신중하게 접근하고 싶으셨어요. 과학적인 조사로 확실하게 확인하자고 하셨죠. 그래서 발표 때까지 반년이 더 걸린 겁니다.”

한국에선 과학적 방법을 총동원해 순교자 유해 확인을 한 건 처음이라고 한다. DNA 검사, 방사성탄소연대측정,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Y 염색체 부계확인검사(Y-STR)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윤지충·권상연은 참수형, 윤지헌은 능지처참형을 당한 해부학적 증거까지 확인했다.

전주교구는 9월1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유해 발견’이란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신부는 “바티칸 언론도 유해 발견 소식을 전했다. 교황청 시복시성위원회도 발견 자료를 정리해 올렸다”고 했다.

바우배기에 안장된 순교자들 무덤에 왜 아무런 표식이 없었을까.

“이 일대가 유항검 복자의 땅이에요. 순교자들이 유항검과 다 인척이잖아요. 유항검 복자가 첫 순교자 안장을 했을 터인데 만약에 유교 제사를 반대해서 죽은 사람의 묘라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파묘할 것 같으니까 아무런 표식을 남기지 않은 거라고 봐요. 당신(유항검 복자)도 순교하시는 바람에 정보가 이어지지 않았어요.”

전주교구 발표 후 바우배기 일대로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흙을 가져가는 이도 나왔다. 순교자 묘지터가 더 노출되면 묘광(墓壙)이 흐트러지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현장을 가림막을 쳐 폐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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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순교자 유해는 바우배기에서 초남이성지 교리당으로 옮겼다. 전주교구는 지난달 16일 현양 미사와 유해 안치식을 거행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묘소’라 명명했다. 촬영 금지 구역인데 성당 허가를 받고 입구에서 촬영했다.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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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순교자 유해는 초남이성지 교리당으로 옮겼다. 전주교구는 지난달 16일 현양 미사와 유해 안치식을 거행했다. 김 신부는 “본래 교리당이었던 곳을 재단장해 유해를 모셨고 이곳을 ‘한국 최초의 순교자 묘소’라 명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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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의 순교자 유해를 안치한 초남이성지 ‘한국 최초의 순교자 묘소’.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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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에게 유해 발견은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는 이분들을 두고 ‘순교 최초 1번이네’ ‘제사 반대의 아이콘이네’ 그러잖아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추상적·관념적으로 사고하기도 하죠. ‘공술기·신문기’ 기록을 보면, 이분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추상적, 관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진짜 아버지로, 모든 삶의 중심으로 모셨어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가장 먼저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기준이 있던 거죠. 내 삶에 전부이신 하느님에게서 생명을 받았고 사랑을 받았기에 진리에 반하는 상황이 오면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거죠. 지금 세상에 대한 회피가 아니었어요. 내 삶의 본질과 그 기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였죠.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일도 기꺼이 받아들인 거지요.”

김 신부는 2018년 8월 초남이성지에 부임했다. 유항검의 삶과 신앙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한다. 박해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했다. “조선 최고 부자였어요. 이 분이 놀라운 게 탐욕에 조금도 젖어 들지 않고, 항상 나누고 베풀었어요. 신분제가 한창일 때 여종의 남편을 형제처럼 대했죠. 그렇기 때문에 유항검 복자가 교리를 가르치면 ‘저분이 말하는 것은 진리임에 틀림 없다’며 쉽게 받아들였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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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 복자 집은 파가저택 형벌을 받았다. 그 터에 예수 조형물을 설치했다.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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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대역죄인으로 단죄 받아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집은 파가저택(조선 시대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웅덩이를 파 연못을 만들던 형벌.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위배한 강상죄인(綱常罪人)에 대한 형벌로, 죄인의 처자(妻子)를 노비로 만들고 죄인이 살고 있던 고을의 호(號)를 강등시키며, 그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는 등 형벌이 뒤따랐다) 당했다.

한국 천주교에서 파가저택 형벌을 받은 거의 유일한 성지다. “조선시대 최고의 형벌이예요 죄인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형벌인 거죠. 유항검 복자와 가족의 삶이 그만큼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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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성지 담당 김성봉 신부가 지난 5일 성지 십자가의 길에 설치된 예수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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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신부는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의 삶과 영성을 한국 천주교회사와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학문적으로 정리한 <초남이 동정부부>도 2012년 펴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장남이다. 그도 22세 나이에 순교했다. 김 신부는 “우리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나이의 부부가) 서로 동정을 무조건 지켜냈다는 데 위대함을 두지 않아요.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품어주고, 맞춰주며 극진히 위했던 것이 중요한 거죠. 초남이성지는 유항검과 유중철·이순이 동정부부를 기리는 성지였다. 이제 최초 순교자 3인의 묘지를 둔 곳이기도 하다.

김 신부는 “신앙인들은 성지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쇄신하고, 일반인들도 일반인들도 이곳에서 삶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완주|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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