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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매경이코노미스트] 명예퇴직만이 최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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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연말이 다가오면서 대규모 명예퇴직이 기사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2년째 계속되면서 다수 기업들은 힘든 시기를 보냈고, 이제야 위드코로나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상황이기에 젊은 피를 수혈하기 위한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의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잘못이 없어도 회사를 위해 퇴직해야 하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처음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한솥밥 문화는 이때부터 깨지기 시작했고, 이제 MZ세대는 평생직장의 개념에 의문을 가지는 세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급변하는 경영환경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었다. C++는 안 배워도 되었지만 파이선(pyhton)을 배워서 프로그램을 짤 수 있어야 한다. 카톡이 아니라 인스타그램(Instagram)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일과 생활은 밸런스(balance)가 아니라 블렌드(blend)로 생각하는 MZ세대들과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퇴장명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나는 IMF 위기를 극복하는 시기에 대학을 마치고 어렵게 입사해서, 베이비부머 선배들과 회식과 야식을 당연시하면서 20년을 보냈다. 칼퇴근이 권리인 MZ세대들과 힘들게 버티면서 이제야 겨우 부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지막 소원인 임원 승진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명예퇴직 대상자라고 하면서 2년 치 월급에 자녀 학자금을 지급할 테니 명퇴를 신청하라고 한다. 정년 60세가 법으로 제도화된 지 오래지만 아직까지 주변에 60세에 정년한 선배는 본 적이 없다. 우리 회사는 지난 20여 년간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코로나19로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회사는 수조 원의 이익을 기록해 왔으며 금년에도 조 단위 순이익을 기록할 예정이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 연말이 되면 30대 후반의 대리부터 명퇴 대상이라면서 신청을 권유한다.

우리 회사는 4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력이 남는다면서도 매년 신입사원을 뽑고 명예퇴직을 시행한다. 지난 20여 년 매일 출퇴근을 했지만 변화에 대한 교육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만 하다보니 미래의 일자리에 대한 고민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회사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준 적도 없다. 조 단위 순이익에서 10분의 1, 아니 20분의 1 정도만이라도 교육훈련비로 사용했다면, 나도 파이선을 배워서 MZ세대와 소통하는 역량 있는 관리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우리 부서 부장님은 한동안 잘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명예퇴직을 신청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아직 중·고교생이라 앞으로 3년 동안 지급하는 자녀학자금이 조건이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신다. 왜 좀 더 버티시지는 않을까? 나는 이제 입사 5년 차 대리인데 나도 곧 명퇴 대상자가 된다고 한다. 뭐야.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나는 10년 후에 부장 자리까지 갈 수 있을까?

생존자증후군이란 이번에는 살아남게 되었지만 다음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걱정이다. 일도 잘하고 평가도 잘 받는 사원들도 생존자증후군을 느낀다. 나도 대안을 찾아야지. 밀려나는 선배들을 보면서 후배들은 더 이상의 기대도 없고, 더 이상의 열정도 가지기 어렵다. 그래서 회사는 또 내보내고 신입사원을 받는다. 재직자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교육훈련을 강화해서, 좀 더 오래 사원들을 활용할 수는 없을까? 순이익의 극대화라는 단기적인 목표를 벗어날 수는 없는가? 생존자증후군으로 밤잠을 설치는 사원과 함께 만드는 ESG 펀드가 제대로 운영될까? ESG 경영 선언을 해봐야 허망한 홍보전략에 불과하다. 고령화 시대에 건강한 사원들과 오래 함께하는 진정한 기업을 많이 보고 싶다.

[이영면 전 한국경영학회장·동국대 경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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