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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경제포커스] 안전한 투자 ETF가 한국서 ‘도박’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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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F 투자 대세로 떠오르자

증권사들 ‘테마형’ 남발하고

개미들은 ‘도박형’ 오용

장기 분산 투자 원칙 지켜야

조선일보

지난해부터 ETF 투자가 대세가 되면서 올해 투자금이 60조원을 돌파하고 상품 수도 500개를 넘어섰다. 증권사들이 앞다퉈 테마형 ETF 신상품을 내놓고 도박형 ETF에 올인하는 개미들도 늘어 '장기 분산 투자'라는 ETF 취지와 멀어지고 있다. 사진은 ETF 상장 종목 500개 돌파 기념식 장면./한국거래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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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고수 워런 버핏이 2005년 미국 월가 펀드매니저들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향후 10년간 투자 성적을 겨뤄 S&P500 인덱스 펀드를 이기면 50만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단 한 명이 내기에 응했다. 그가 월가의 대표 펀드 5개를 골랐다. 결과는 어땠을까. S&P500 인덱스 펀드의 누적 수익률은 85%에 달한 반면 펀드매니저가 고른 펀드의 수익률은 최고 63%, 최저 3%였다. 나머지 3개도 28%, 9%, 8%로 인덱스 펀드에 훨씬 못 미쳤다. 워런 버핏은 “미국 투자자들에게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의 동상을 세운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인덱스 펀드를 개발한) 존 보글”이라고 했다. 버핏은 아내에게 남긴 유언장에도 “투자금 10%는 단기 국채에, 나머지 90%는 S&P500 인덱스 펀드에 넣으라”고 썼다.

하지만 수익률이 전체 주가 상승률을 추종하도록 만든 인덱스 펀드에도 단점이 있다. 환매를 신청한 날 종가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최종 수익을 예측하기 어렵고, 환매에도 며칠 걸린다는 점이다. 인덱스 펀드의 이런 단점을 보완해 주식처럼 실시간 사고팔 수 있게 만든 것이 바로 ETF(상장지수펀드)이다. 낮은 수수료, 실시간 거래, 위험 분산의 장점을 갖춘 ETF는 100년래 가장 혁신적인 금융 상품이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런데 국내에선 ETF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증권사들이 마진이 적은 ETF 판매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작년 팬데믹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MZ세대 동학 개미들이 적은 돈으로 유망 기업 여러 곳에 투자할 수 있는 ETF의 장점에 주목했다. 대형 증권사들이 재빨리 흐름에 올라타 마케팅에 나섰다.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은 유튜브 방송에 직접 출연해 ETF 투자를 권했다.

ETF 투자가 대세가 되면서 ETF 투자금이 올해만 14조원 늘어 60조원을 돌파했다. 상품 종류도 500개를 넘어섰다. 하지만 금융회사들이 2차 전지, 전기차, 메타버스 등 유행에 올라타는 테마형 ETF를 남발하고, 펀드매니저가 투자 종목 비중을 임의대로 바꾸는 액티브 ETF까지 앞다퉈 내놓으면서 ETF 투자 생태계가 혼탁해지고 있다. 예컨대 2차 전지 ETF의 경우 투자할 만한 기업은 많지 않은데 너무 많은 투자금이 몰려 2차 전지 소재 관련 기업의 시총이 1년새 2배(64조원)로 뛰고 주가 수익 비율이 62배까지 치솟았다. 주가가 거품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한 방을 노리고 특정 지수 상승·하락분의 2~3배 수익을 좇는 레버리지·인버스 ETF의 과열도 문제다. 전체 ETF 거래 중 이런 도박형 ETF 비율이 50%에 육박한다.

이런 양상은 ‘장기 분산 투자’라는 ETF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잘 찍으면 고수익이지만, 잘못 고르면 큰 손실을 초래하는 개별 종목 주식 투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올 1~9월 중 수익률 하위 10개 ETF를 보면 지난해 각광을 받았던 바이오·헬스 테마의 ETF가 6개나 된다. 평균 손실률이 20%를 웃돈다.

증권사들의 테마형 ETF 남발과 마케팅은 수수료를 노린 것이다. 지수형 ETF는 수수료율이 0.001%까지 내려간 반면 테마형 ETF는 0.5% 내외여서 500배가량 비싸다. 워런 버핏이 조언한 대로 ETF 투자는 저비용 지수형에 투자하는 게 정석이다. 지수형 ETF 대표 상품인 미국 S&P500 ETF는 올 들어 22%, 나스닥지수 ETF는 20% 수익을 올리고 있다. 1970년대 초 ETF를 개발한 미국 금융회사가 인덱스 펀드 창시자 존 보글을 찾아가 지지를 요청하자 “잦은 매매는 단기 투자를 유발한다”고 우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존 보글이 환생해 한국의 ETF 투자 문화를 보면 뭐라고 할 지 궁금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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