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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무슨 놈의..." "듣기 거북한 말씀"…남북회담 기록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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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20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쌍방 파견원의 첫 접촉.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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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20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만났다. 대한적십자사 파견원 자격으로 북측 관계자를 만난 이창렬 서무부장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네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날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은 남북 당국 간 회담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포함, 600여회 이어진 남북회담의 출발이 이날이었다.

통일부는 4일 이런 내용이 담긴 1970년대 초반 남북회담 문서의 일부를 공개했다. 비공개 자료인 「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에 수록된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 남북회담 기록의 일부로, 총 1652쪽 분량이다.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부터 25차례에 걸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의 진행과정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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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4일 공개한 남북대화 사료집 남북적십자회담 부분의 표지 모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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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가 공개한 1971년 9월 29일 남북적십자 제2차 예비회담 자료집을 보면 남북 대표단은 제1차 예비회담 당시 공감대를 이룬 내용을 바탕으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장시간 논의를 이어갔다. 특히 적십자 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서에 담았다. 통일부는 문서를 공개하면서 "남북이 이날 채택한 합의서가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서"라고 밝혔다.

실제 이날 합의를 토대로 남북이 마련한 남북회담 진행 절차는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완성도 높은 내용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 합의서 내용은 지금까지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 틀 역할을 했다"면서 "수행원의 수, 회의기록 방법, 형식, 순서 등 회담 운영의 일반적 방식까지 세밀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북은 2차 예비회담에서 판문점 내 상설 회담연락사무소의 설치도 합의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자유의 집'에, 북한 적십자회는 '판문각'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이를 연결하는 왕복 2회선의 전화를 가설·개통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측은 인삼차를, 남측은 사이다를 미리 준비해 권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회담 장소와 일정을 놓고서는 설전이 오갔다. 차기 회담 일정을 두고 북측 대표가 "완전한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단이라면 다음 회의 날짜를 결정할 수 있지 않냐"고 포문을 열자 남측 대표는 "듣기 거북한 말씀을 하셨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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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남북적십자사 예비회담 당시 회담장인 판문점 주변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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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제13차 의제문안 실무회담에서 남북은 본회담에 상정할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5개 조항의 의제를 다뤘다. 해당 회담이 열린 1972년 6월 5일 회의록에는 문구 표현을 두고 양측 대표단이 견해차를 보이는 모습이 담겼다.

판문점에서 열린 당시 실무회담에서 북측 대표는 "남측이 문건을 책상 위에 집어 던지는 등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을 서슴없이 했디"며 "아름답고 고상한 우리말이 있음에도 무슨 놈의 '연구'라고 하는 등 비문화적인 발언과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며 기선 제압을 시도 했다. 이에 남측 대표는 "27년간의 단절이 서로의 언어의 표현이나 진의를 전달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고 맞받았다.

양측 대표단은 이날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거래,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 등 5개 항목의 남북적십자 본회담 의제에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양영식 전 통일부 차관은 저서 『통일정책론』에서 "남북적십자회담 재개시 수정하지 않고 재확인할 정도로 잘 종합되고 다듬어진 내용"이라고 평가했다.

1971년 8월 남북적십자사 파견원의 어색한 판문점 만남은 이후 평양과 서울을 7차례나 오가는 남북적십자 본회담으로 이어지면서 남북대화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가족 재회와 고향 방문을 기다리던 1000만 이산가족에게 큰 실망을 남긴 채 중단되고 말았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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