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잘 지냈는가?
아, 인사가 잘못됐군. 별일 없었는지 묻는 편이 낫겠네. 지난 2년 동안 자네의 임무가 ‘별일’이다 보니, 별일이 없었냐고 묻는 일반적인 우리네 안부 인사가 지금 자네한테만큼 딱 들어맞는 경우도 없을 것 같네.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
아무튼 자네가 맡은 별일 덕에 우리는 일상회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 조심스레 맨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됐어. 아직 야외에 제한된 얘기긴 하지만, 그 답답한 마스크를 벗으니 정말 살 것 같군. 오랜만에 내가 자네에게 그간 고마움을 전할 겸 다시 보자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야. 방역도 그렇지만, 최근 몇 년간 자네는 이곳저곳 너무 많은 곳에 얼굴을 내밀어 혹사당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 아닌 말로 개나 소나 자네를 불러대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더군. 친구로서 그게 안쓰러워 이젠 별일도 마무리돼가니 본업에 집중해달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은 거지.
사실 자네 본관(本貫)이 어딘가? 대한민국의 ‘한류K씨’ 아니던가? 20여년 전 동아시아 일대에 소위 한류(Korean Wave)의 씨를 뿌리면서 자네는 문화예술을 본관으로 한 한류K씨의 시조가 됐네. TV드라마와 영화란 이름의 자식들이 동남아 일대를 석권하더니 급기야 세계도 좁다하더라고.
요샌 그중에도 BTS라는 돌연변이 같은 별종이 나와 온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면 참 대단한 가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친구들 전에 싸자 이름의 자식도 있었지 아마. K팝은 이제 세계인의 밥이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닐걸세.
난 자네 집안의 이런 활동을 보면 피가 끓는다네. 약간의 ‘문화적 쇼비니즘’ 같은 게 나에겐 있는 것 같아.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맹목적인 자부심과 애국심 같은 거지. 솔직히 근거 없이 생겨난 자부심에서 하는 말은 아니라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 3년 정도 정부기관을 맡아 우리 문화예술의 국제교류에 매진한 적이 있잖은가. 벌써 거의 10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한국의 문화예술을 흠모하는 세계인들의 눈빛을 똑똑히 확인했다네. 때가 왔구나 싶었던 거지. 대한민국이 문화예술의 변방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각성. 일단 K팝은 그걸 증명했다고 보네.
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가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게 한 국가의 영역 안에 국한되는 얘기 같진 않아. 마치 이런 거야. 아까 ‘때가 왔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주목한 세계사 속 동북아시아 역사의 반복은 문화예술과 관련한 중국과 일본의 사례에서 비롯된 거야. 한 세기 터울로 반복되는 어떤 흐름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놀랍더군. 다 자네 덕분에 공부하며 알게 된 걸세.
먼저 중국의 예부터 볼까. 청 강희제 연간인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반 유럽 일대에 중국풍이 풍미했네. 중국을 따라하는 이런 문화예술의 경향을 불어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하더군. 볼테르 등이 앞장서 찬양하면서 중국의 장식과 문양 등은 유럽의 건축과 가구, 정원, 의상 등에 응용돼 열풍을 일으켰어. 여기에 로코코 양식이 호응했지.
이보다 일본의 예는 더 극적이었던 것 같아. 시누아즈리를 거친 약 1세기 후인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자포니즘(Japonism)이란 일본풍이 유럽을 휩쓴 거야.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의 현란한 색채가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을 매료시키면서 일본풍을 주도했지. 글자대로 덧없는 세상을 그림으로 포착한 우키요에는 주로 유곽의 일상 등 서민들의 애환을 담아 당시 지배층의 관심사가 아니었어. 그런데 이게 유럽인들에게 발견되면서 일약 일본풍의 진앙이 된 거야.
자, 그로부터 다시 한 세기가 지났어.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한류가 찾아왔네. 어떤가, 자네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노파심에서 한마디 하네. 본분에 집중하게. 더불어 한류가 일종의 흐름을 넘어 세계인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려면 우리의 순수예술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거야. 사실 자네에게 간곡히 하고 싶은 말은 이거라네. 강건하시게!
정재왈 예술경영가·고양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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