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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허연의 책과 지성] 보들레르가 1400통의 편지를 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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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샤를 보들레르는 편지광이었다. 프랑스에서 출간된 그의 서간집에는 그가 중학생이었던 1832년부터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867년까지 쓴 편지 1420통이 담겨 있다. 유실된 편지도 있을 테고, 보들레르가 익명으로 쓴 편지도 꽤 많았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그가 생전에 쓴 편지는 엄청난 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들레르는 거의 편지에 매달려 세상과 소통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편지는 이메일처럼 몇 줄 써 보내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수단이 아니었다. 손으로 써서 봉투에 넣고 부치면 도착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답장을 기다린다는 건 그야말로 하세월이 걸리는 일이었다. 절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근 보들레르의 중요한 편지들을 추려 국내에 출간될 예정인 책 원고를 미리 볼 기회를 얻었다. 그중 가장 먼저 눈길이 머문 편지는 보들레르가 1853년 사교계 거물이자 예술가를 위한 살롱 운영자였던 사바티에 부인에게 보낸 것이었다.

"가여운 천사여, 그대의 날카로운 음색이 노래했지./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고/어떤 정성으로 치장하든 언제나/인간의 이기주의는 드러나고 말지."

시 형식에 담긴 편지에서 보들레르는 '인간의 이기주의'를 거론한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구원을 노래하지 않았다. 그것을 거짓이라고 본 것이다. 보들레르는 독자적이었다. 그의 시는 파괴적이고 고독했다. 그에게는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계몽주의나 박애정신 같은 건 없었다. 종교적 경건함과도 거리가 멀었으며, 진지했다는 측면에서 랭보의 상징적 낭만주의와도 결이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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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서간집은 흥미롭다. 그는 시로는 할 수 없었던 직접적인 고백과 아픔을 편지에 털어놓았다. 심리적 상처, 육체적 고통, 경제적 빈곤, 자살의 유혹 같은 것들이 편지에 얼룩져 있다. 천재 같은 직관을 퍼붓다가도 때로는 알량한 모습으로 속물처럼 징징대는 보들레르의 편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다 간 유약하고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실상을 보여준다.

보들레르는 공증인이었던 나르시스 앙셀에게 사랑했던 혼혈 창녀 잔 르메르(잔 뒤발)에게 전해 달라며 이런 편지를 쓴다.

"잔 르메르 양께 이 편지를 전할 때쯤이면 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나 스스로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자신을 불멸이라 믿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에라도 저는 자살하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너무도 명석해져서 원고들을 다루는 힘이 넘쳐납니다."

그가 평생 '악의 꽃'이라는 단 한 권의 시집만을 남겼기에 보들레르의 편지는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 흡사 일인극 배우를 만나는 듯하다. 그는 일인극 배우처럼 근대라는 무대에 서서 현대시의 막을 열어젖힌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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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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