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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포럼] 푸틴의 전쟁에서 러시아의 전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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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소파에 앉아 TV로만 지켜보던 전쟁이 현실이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만명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면서, 평범한 러시아 가정에 징병 통지서가 날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7개월이 지났지만, 러시아인들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수입물가가 뛰고, 러시아 경제가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미 확보한 전쟁자금으로 통화와 고용 시장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맥도널드가 떠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된 것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원령은 다르다. 나의 아버지, 형제, 남편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동안 반전 목소리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전역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전 시위에 참가하거나, 시위 참여를 독려하면 최고 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는 검찰의 경고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최소 37개 도시에서 시위가 열렸고, 체포된 사람도 1000명이 넘었다.

공항과 국경엔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무비자로 떠날 수 있는 튀르키예 이스탄불, 아르메니아 예레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등으로 가는 직항편은 매진됐고, 핀란드와 몽골로 향하는 국경 지역 도로에는 차들이 늘어섰다.

푸틴 대통령도 징집은 인기 없는 일이며,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전쟁 초기부터 군사 동원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그는 결국 동원령을 선택했다.

동원령은 군사적으로는 병력 고갈을 의미하지만, 국내 정치적으로는 '이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은 동원령이 한 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도 전쟁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18~60세 남성의 출국을 금지했을 때,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반응은 러시아 국민들과 달랐다. 해외에 나가 있던 남성들마저 나라를 지키겠다며 귀국했다.

두 나라의 차이를 만든 것은 명분과 신뢰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는 자국 보호와 영토 수복이란 강력한 전쟁 동기가 있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그것이 없다. 러시아인들은 처음부터 우크라이나와 싸우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무기 지원을 받고 있는 데다 최근 영토 탈환으로 기세마저 높다. 러시아 예비군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전장에 투입된다면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동원령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발은 그들이 이 전쟁을 지지하지도, 푸틴 대통령을 믿지도 않음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서방세계는 '러시아인들의 망명을 허용하겠다'며 푸틴 체제를 흔들기 위한 심리전에 돌입했다.

물론 지난 20년간 철옹성 같았던 푸틴 정권이 쉽게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성급하다.

하지만 이번 동원령이 전쟁과 푸틴 정권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전쟁 직후 여론조사에서 80%에 달하는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그때는 아직 전쟁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치기 전이다. '전쟁을 지지하는 대신 사생활을 방해하지 말라'는 정부와 국민들 간 암묵적 계약이 깨진 만큼 여론은 더 이상 푸틴 대통령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번 전쟁이 '푸틴을 위한 전쟁'이지 '러시아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동원령 반대 운동은 언제든 정권 반대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 미세한 균열은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이은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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