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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이슈 일본 신임 총리 기시다 후미오

예산도 인사도… 아베파에 눌린 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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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재무상이 추경안 정하자 아베파 “더 늘리라”며 뒤집어

조선일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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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오후 2시쯤 일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에게서 25조1000억엔(약 240조원)의 추경예산안을 보고받았다. 기시다 총리는 재정 건전성을 중시했지만 물가가 치솟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돈 살포를 결심했다. 같은 시각 총리 관저에서 600m 떨어진 자민당 본부 9층에선 자민당 아베파(派) 차기 리더로 꼽히는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정조회장이 당의 경제정책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기시다 총리는 하기우다에게 전화해 추경안을 설명했다. 전화를 끊은 하기우다는 곧장 회의장에 돌아가 90여 명의 의원들에게 총리의 전화 내용을 전하고 “아직 의원들이 예산 규모를 논의 중인데 이런 짓(금액 확정)을 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더 많은 예산을 원했다. 회의장은 내각에 대한 성토장이 됐다. 스즈키 재무상은 오후 5시쯤 하기우다를 찾아와 “확정안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기우다는 “예산을 더 늘리라”고 주문했고 스즈키 재무상은 오후 9시 다시 기시다 총리를 찾았다. 다음 날 기시다 내각은 29조엔 규모의 추경을 발표했다. 정치권에선 ‘시급 1조엔’이란 말이 나왔다. 하기우다가 예산 증액을 요구한 지 4시간 만에 4조엔이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총리에 오른 기시다가 자신 뜻대로 정국을 이끌지 못하고 주변 눈치를 더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일본 정계에서 나오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5개월 전 피격으로 사망했지만 주요 정책 결정에서 아베파에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권 한 관계자는 “아무리 소수파 출신이라고 해도 총리가 이렇게까지 휘둘리는 건 기억에 없다”고 말했다.

기시다 내각은 방위비 증액 문제에서도 아베파 주장대로 5년 내 방위비를 2배로 늘려 국내총생산(GDP)의 2%로 하기로 했다. 향후 5년간 방위비 총액을 43조엔으로 결정, 직전 5년(약 25조5000억엔)보다 50% 이상 늘렸다. 방위예산 조달 방법도 아베파 뜻대로 됐다. 하기우다는 최근 “증액분은 향후 2년간은 국채로 충당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세는 안 된다고 못 박은 것이다. 그러자 기시다 총리는 8일 “2027년 이후 증액 방위비 가운데 1조엔 정도를 증세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기시다 총리는 자신이 경질한 장관을 하기우다가 주요 자리에 앉히는 걸 지켜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0월 구 통일교와 유착 문제가 불거진 야마기와 다이시로 경제재생담당상을 경질했는데 하기우다가 그를 4일 만에 ‘자민당 코로나 대책본부장’에 앉혔다. 기시다 총리와는 사전 협의도 없었다.

기시다 총리의 이 같은 치욕적 상황은 당내 소수파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기시다파(46명)의 수장인 기시다 총리는 작년 아소파(53명)와 모테기파(56명)의 지원 덕에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고, 총리에 올랐다. 총리 취임 직후에는 아베 전 총리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의 사망 이후에는 구심점을 잃은 최대 정파인 아베파를 제대로 끌어안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베파는 총리 선출 당시엔 기시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최근 정파 수장을 노리는 하기우다 정조회장이 독자적인 존재감을 키우면서 기시다와 거리를 두고 있다.

최근 30%대까지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모테기파와 아소파의 지원사격도 현저하게 줄었다. 일본 외교가의 한 인사는 “2000년 이후 자민당 출신 총리는 대부분 아베파 원류인 세이와카이(淸和會) 파벌 출신이었다”며 “소수파인 데다 지지율마저 추락한 기시다 총리가 소신대로 정책을 밀어붙이기엔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모리 요시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 등이 모두 세이와카이 소속이었고, 예외는 1년짜리 단명에 끝난 아소 다로 전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뿐이란 것이다. 그나마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는 아베 전 총리가 지지해 총리가 된 사례다.

일본 정계에선 기시다 총리가 의회 해산을 택할지 모른다는 얘기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오카다 간사장은 최근 “지금 당장 의회 해산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면서도 “야당으로선 언제 해산되더라도 대처할 준비는 해두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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