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미국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화상 연설하는 젤렌스키 대통령 |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산레모 가요제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 연설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
올해로 73회를 맞는 산레모 가요제는 이탈리아 공영 방송 라이(RAI)가 주최, 주관하는 국영 가요제다. 오는 7일부터 11일까지 이탈리아 서남부 해안도시 산레모에서 열린다. 시청률 50% 이상이 보장되는, 가히 국민 가요제다.
지난해 미국의 3대 음악 시상식 중 하나인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톱 록 송' 트로피를 가져간 이탈리아 출신의 록밴드 모네스킨이 바로 산레모 가요제 출신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많은 아티스트와 히트곡을 배출한 산레모 가요제의 폐막일인 11일 사전 녹화한 화상 연설을 통해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할 예정이다.
젤렌스키에게 주어진 연설 시간은 고작 2분이지만 그가 산레모 가요제에 화상 연사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이탈리아에선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됐다.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인프라 교통부 장관은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길 원하지만, 무대는 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나면 산레모 가요제를 보겠지만, 다른 건 안 듣고 노래만 들을 것"이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살비니 부총리는 이탈리아에서 대표적인 친러시아, 친푸틴 정치인으로 꼽힌다. 살비니 부총리가 포문을 열자 다른 정치인들도 저마다 목소리를 냈다.
야당인 오성운동(M5S)의 당수인 주세페 콘테 전 총리는 "젤렌스키가 지난해 3월 우리 의회에서 화상 연설할 때는 기뻤지만 솔직히 산레모 가요제와 같은 가벼운 행사에 등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살비니 부총리와 콘테 전 총리는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다. 살비니가 2019년 당시 총리였던 콘테를 밀어내고 조기 총선을 통해 총리직에 오를 욕심으로 오성운동과 이룬 연정을 파탄 낸 전력 때문이다.
'정적' 관계인 여야의 유력 정치인이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내자 각종 대담 프로그램에선 "왜 가요제에서 젤렌스키가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떼쓰는 소리를 들어야 하느냐", "젤렌스키가 하이힐을 신고 캉캉 춤을 추면 봐줄 용의가 있다"는 등의 반발과 조소가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대중의 반응도 호의적이지 않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산레모 가요제에 초대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온라인 청원에는 8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젤렌스키는 지난해 미국의 음악상인 그래미상 시상식에 깜짝 등장했고, 그 뒤로도 칸·베니스 영화제, 미국의 골든글로브 시상식 등 여러 문화행사에서 연설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했다.
전 세계 유명 이벤트에 출연해 응원과 찬사를 받았던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독 이탈리아에선 논란이 되고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산레모 가요제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 방송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순수 가요제가 정치색으로 변질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크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이탈리아 국민들의 피로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라이가 지난달 25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52%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39.9%에 그쳤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치솟는 등 경제적인 문제로 가뜩이나 삶이 고단해진 상황에서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전쟁이 길어지는 것보다는 외교적인 방식으로 해를 넘긴 이 전쟁을 빨리 끝내길 원한다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논란이 커지자 라이 이사진이 이 사안에 개입했다.
이사진은 지난달 30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2분짜리 연설 영상을 자신들에게 미리 보여달라고 제작진 측에 요구했다.
급기야 산레모 가요제 예술감독인 아마데우스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연설에 '평화'에 관한 내용만 담아달라고 협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무기 지원 요청은 빼고 오직 평화에 대한 호소로 연설문을 채우라고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러시아는 최근 우크라이나 동부 바흐무트에 인해전술을 펼치면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위기 국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무기 지원 요청을 제외하고 연설문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뭐가 있을까. 그는 무엇으로 평화를 호소해야 할까.
젤렌스키 대통령의 2분짜리 연설을 두고 '검열'까지 하는 이탈리아의 상황이 전쟁의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아찔할 따름이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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