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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관리소장 칼춤에 경비원 극단선택 속출"…소장은 "내 탓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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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8시 서울 대치동의 한 아파트단지. 아파트 경비원 30여명이 조회를 위해 분리수거장 인근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전날(14일) 오전 7시 16분 이 아파트에선 경비원 박모(74)씨가 “(관리)소장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해 사망했다. 이 소식을 다른 경비원들에게 전하던 경비대장 이모씨는 “오죽했으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겠느냐”며 울먹였다. 동료 경비원들은 “단체 행동을 해야 한다” “추모공간을 설치하자” 등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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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서울 대치동의 한 아파트 경비원들이 조회를 시작하기 전 전날 숨진 동료 경비원 박모씨를 추모하며 묵념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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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들은 전날 박씨 사망 이후 아파트단지 곳곳에 A4용지 1장 분량의 호소문을 붙였다. 박씨가 관리소장의 부당한 인사 조처로 인격적 모멸감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수일 전에는 관리소장이 해고 조치한 외곽 청소원 김모씨가 이를 비관해 해고 다음 날 사망했고, 지난달에는 십여명의 경비원이 (관리소장의) 칼춤에 견디지 못하고 사표 (제출) 후 다른 아파트로 이직했다”며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입대의회장(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관리소장의 부당하고 비이성적인 전횡은 우리 아파트가 자살자가 속출하고, 근무를 기피하는 죽음과 비이성의 굿판이 되게 했다”고 적었다. 이들은 아파트 입구 표지석에 ‘관리소장과 입대의회장의 갑질로 경비원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 사망했다’는 내용의 현수막도 내걸었다.

이날 만난 이 아파트 전·현직 경비원들은 관리소장이 권한 밖의 갑질을 서슴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에 따르면, 박씨는 2013년부터 약 10여년간 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 4년 전부터 경비반장을 맡았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관리소장에 부임한 안모씨가 지난 8일 박씨를 일반 경비원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이후 6일 만에 박씨가 투신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안씨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반장에서 일반 경비원으로 강등시키는 방식으로 갑질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박씨처럼 반장직을 잃은 뒤 이틀 만에 퇴사한 서모씨는 “정신적으로 큰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고, 경비대장 이씨는 “강등되면 월급도 40만원 적게 받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의 문제”라며 “소장이 매일 아침 지시사항을 복명복창하라고 명령하며 1시간씩 잔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난 9일 이 아파트에서 일하던 70대 청소원 김씨가 집에서 심장마비로 숨진 채 발견된 데에도 부당한 인사 조처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의심했다. 김씨가 숨지기 전날 갑자기 일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한 경비원은 “돌아가신 미화원은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았다. 6월 말까지 계약이 돼 있는데 소장이 ‘몸이 불편한 사람을 왜 쓰냐’며 갑자기 해고한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인원을 줄이기 위해 인사로 갑질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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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서울 대치동의 한 아파트 표지석에 이 아파트 경비원의 투신 사망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던 70대 박모씨는 전날 관리소장의 인사 갑질을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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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관리소장 안씨는 자신을 향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안씨는 “갑질을 한 게 있으면 박씨가 유서에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겠느냐”며 “한 번도 호통을 치거나 한 적이 없다. 한번은 박씨가 ‘충성’하면서 들어오길래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한 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내 노력으로 경비원들의 고용이 유지됐다”며 “반장이던 분들이 일반 경비원이 된 건 경비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자동으로 반장이 교체됐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청소원 김씨 사망과 관련해서도 “그분이 ‘몸이 아파서 못 하겠다’며 스스로 나간 거지 해고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한편,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수서경찰서는 이날 동료 경비원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경찰은 박씨의 투신 경위는 물론 이 아파트 경비원 고용·인사와 관련해 위법사항이 없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김민정 기자 kim.minjeong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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