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아니, 이 금리에 어떻게 은행이 망해?”[김성모 기자의 신비월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글로벌 신(新) 비즈니스 가이드(33)
‘신비월드’는 세계 각국에서 세상을 이롭게 이끄는 혁신적인 기업과 새로운 정보기술(IT) 소식들을 소개합니다. ‘파괴적 혁신’을 꾀하는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주요 기업까지, 빠르게 변해가는 ‘신(新) 글로벌 비즈니스’를 알차게 전달하겠습니다.
● ‘올해의 은행상’ 받자마자 ‘파산’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최고의 금융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그레그 베커 실리콘밸리은행(SVB)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2일(현지 시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벤처캐피털(VC) 행사에서 수상 소감처럼 보이는 말을 꺼냈다. 다음 날, SVB의 영국 법인이 실제로 상을 받았다. 영국 경제 매체 ‘시티에이엠’이 선정하는 ‘올해의 은행’에 선정된 것. 그런데, 1주일 만에 이 은행이 파산했다.

1983년 설립된 실리콘밸리은행(SVB)은 스타트업과 정보기술(IT) 기업, VC가 주로 거래하는 상업은행이다. 본점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다. 캘리포니아(24개)와 매사추세츠(6개)에 총 30개 지점을 가진 SVB는 총자산이 276조5000억 원으로 미국 은행 중 16번째로 덩치가 크다. 역사가 깊지는 않지만, 무시할 만한 규모는 아니다.

40년 된 은행이 파산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6시간.

‘SVB 위기설’은 8일 처음 등장했다. SVB가 약 18억 달러(약 2조3600억 원)의 손실을 봤으며 현금 조달을 위해 신주발행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은행이 급전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금자들의 인출이 시작됐다.

SVB 주가는 9일 나스닥 시장에서 개장과 동시에 급락했다. 전일 대비 60.4%나 폭락했다. 큰 폭의 주가 하락에 놀란 예금자들이 돈을 빼기 위해 더 몰려들었고, 9일 하루 동안 SVB에서 총 예금액의 24%인 약 420억 달러(약 55조 원)가 빠져나갔다.

‘뱅크런(예금인출사태)’이 발생한 이후 미 금융당국이 재빠르게 나섰다. 10일 오전 SVB를 폐쇄하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 관리자로 선임했다. FDIC가 만든 법인으로 SVB 예금을 옮기고, 보유 자산을 매각하도록 했다. 파산한 은행의 뒤처리를 맡긴 셈이다.

뱅크런과 미 은행의 파산에 전 세계 증시가 출렁였는데, ‘은행 트라우마’를 가진 미국이 특히 놀란 분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악몽이 떠올라서다. 한국이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고 ‘환율’을 예의주시하게 된 것처럼 미국 역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은행의 건전성’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그럼에도 중대형 은행이 이틀도 안 돼 망했으니 충격에 빠질 만하다. SVB보다 큰 규모의 상업은행이 문 닫은 사례는 2008년 총자산 3070억 달러(약 402조 원)의 워싱턴뮤추얼이 유일하다.

그런데, 보통 금리가 오르면 은행은 큰돈을 버는 것 아니었나. 고금리 시대에 SVB는 ‘왜’, 이토록 ‘빠르게’ 파산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동아일보

일러스트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모든 스타트업은 SVB로 통한다”

SVB는 주로 미국의 중소기업과 기술 스타트업을 지원하면서 성장했다. 기존 은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금·대출, 자산관리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이 투자받을 수 있도록 행사를 열어주고, 인수합병(M&A)이나 서비스 판매와 관련한 조언도 해줬다. 고객들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네트워킹 기회도 제공했다.

심지어 초기 와이너리에는 수익이 나오지 않는 3~5년(포도나무가 자라는 기간)에도 돈을 빌려줬다. 영국 유명 VC 투자자인 로빈 클레인은 “대형 은행과 다르게 SVB는 회사가 아무리 작더라도 상담을 해줬다”라고 했다. 스타트업들은 SVB를 자신과 똑같은 혁신적인 회사로 여겼을 것 같다.

미국 VC로부터 투자받고 지난해 상장한 테크·헬스 기업 중 44%가 SVB의 고객이었다. 클라우드 보안 업체 엔돌랩스의 CEO인 바룬 바드워는 “모든 스타트업은 실리콘밸리은행으로 통한다”라고 전했다. (SVB가 스타트업들이 다른 은행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사실상의 독점 계약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뒤늦게 나오고 있다)

SVB는 미국의 스타트업, 테크 기업에 발맞춰 성장해왔는데, 코로나19 발생 이후 큰 변화가 있었다. 0%대의 극단적인 저금리 상황에 막대한 유동성이 벤처기업에 몰리면서 SVB의 예금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SVB의 예금은 2017년 말 440억 달러(약 57조6000억 원)에서 2021년 말 1890억 달러(약 247조2000억 원)로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시장 분석 업체 오토노머스 리서치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미 은행 업계 평균 성장률은 37%였다.

같은 기간 SVB의 대출은 230억 달러(약 30조 원)에서 660억 달러(약 86조3000억 원)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을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모아서(예금) 대출 등으로 장기간 운용해 이윤을 남긴다. SVB가 덩치는 커졌지만, 장사는 영 시원찮았던 셈이다. 물론, 예금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SVB가 망한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투자’가 문제였다.

동아일보

SVB는 미국의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을 지원하면서 규모를 키웠다. 기업 금융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이 투자받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SVB 홈페이지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장기 채권에 ‘몰방’한 SVB

SVB는 2020년부터 채권에 막대한 예금을 투자했다. 채권은 정부나 공공기관, 회사 등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는 일종의 ‘차용증’이다. 기간과 이자를 정하고 다수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SVB는 예금 중 1200억 달러(약 156조7000억 원)를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 등을 사는 데 썼다. 이 중 80% 이상 10년 이상 지나야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장기 상품이었다. 미국 정부가 망하지 않으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였다.

2021년 SVB가 매입한 미 국채 등 증권의 잔액은 1280억 달러(약 167조4000억 원). SVB가 자산에서 채권 등 증권에 투자한 비율은 55%로, 미국의 모든 은행 중에서 가장 높았다. 2020년과 2021년에는 늘어난 자산의 71.3%(99억 달러)를 채권 등에 쏟아 부었다. 물가도 높아지는 데 현금으로 보유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SVB는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약정)가 0%대일 때부터 투자하기 시작했다. 910억 달러(약 118조9000억 원)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채권을 샀는데, 평균 이자가 1.64% 수준이었다.

금리가 치솟으며 문제가 시작됐다. 2022년 1월 연 0~0.25%였던 미국의 기준금리는 지난해 말 4.25~4.50%까지 치솟았다. 현재는 4.75~5.0%다. 물가를 잡기 위한 폭풍 같은 금리 인상이 이어졌는데, 이 때문에 SVB가 잔뜩 사놓은 채권이 헐값이 돼버렸다.

예를 들어 연 1% 금리를 보장받고 10년 뒤에 원금 100만 원을 돌려받는 상품(채권)을 샀다고 치자. 현재 이 상품을 100만 원에 내놓으면 팔릴까. 당연히 아무도 안 살 것이다. 현재 1년만 은행에 넣어놔도 연 4% 이상의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주식도 아니고 안 팔면 원금을 지킬 수 있다. ‘존버(힘들게 버팀)’도 있으니까.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금리가 다시 떨어지면 사놓은 채권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채권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SVB가 그랬다.

동아일보

AP 뉴시스


● 고금리가 불러온 스타트업의 보릿고개

금리가 올라가자 예금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2021년 말까지 SVB에 예치된 예금은 주로 요구불예금에 속해 있었다. 고객에게 이자를 거의 주지 않아도 되는 수시입출금 통장(파킹통장)에 예금이 들어가 있었다는 의미다. 금리가 많이 오른 뒤, 고객들은 정기예금이나 적금 통장 등으로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SVB는 이자를 더 줘야 하니 비용은 늘어났다.

더 큰 문제는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졌다는 점이다. 보통 수익이 없거나 적은 스타트업은 미래 가치를 반영해 평가받는다. 향후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미리 계산기를 두들겨 보고, 이를 기준으로 투자가 이뤄지기도 한다.

그만큼 고금리 시기에는 취약하다. 현재의 돈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예금만 해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언제 망할지 모르는 회사에 투자할 이유가 줄어든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21~2022년 VC들이 3000억 달러(약 392조 원) 넘게 돈을 모았지만, 지난해에 1년 내내 투자를 줄였다”라고 1월 전했다.

회사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기 때문에 주식 시장에서 돈을 끌어 오기도 어렵다. 지난해 미국 주식 시장에서 조달된 자본은 32년 만에 최저치였다.

투자를 못 받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으로 회사 운영비는 늘고, 물건(서비스)은 덜 팔리는 상황.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회사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스타트업들은 모아둔 돈으로 ‘보릿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다수의 업체가 실리콘밸리은행에서 예금을 찾아 썼다. SVB는 예금자(스타트업)들의 늘어난 인출 요구로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채권을 헐값에라도 팔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SVB는 현금 조달을 위해 8일 신주발행(파산에 이르게 만든 첫 신호)에 나섰는데, 여기서 채권 손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블룸버그는 “SVB가 자금을 조달하려고 했을 때 이유로 든 것이 ‘스타트업들의 현금 인출’이었다”고 9일 전했다.

동아일보

미국 매사추세츠주 웰즐리에 있는 SVB 지점. 매사추세츠=AP 뉴시스


● ‘리틀 마이클 버리’

SVB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왜들 몰랐을까.

장기 채권을 보유하면 회계장부에는 손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재무제표에 현재의 가격(시세)이 아닌, ‘액면가(만기 때 돌려받는 금액)’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팔기 전까지는 손실이 아니다.

SVB의 재무제표를 상세히 보고 위험성을 알린 ‘리틀 마이클 버리’가 있기는 했다. (버리는 영화 ‘빅쇼트’의 실존 인물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측한 바 있음)

헤지펀드사 레이징 캐피털을 운영하는 윌리엄 마틴은 올해 1월 “SVB가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고 트위터에 올렸다. 마틴은 SVB 주가가 내려가면 이득을 보는 ‘숏 포지션’에 자신의 자금의 대부분을 투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마틴은 사태가 벌어진 이후 “이렇게까지 빨리 망할 줄 몰랐다”면서 “주변에 이를 알리려 했지만, 가까운 친구 두 명의 달러가 SVB 금고에 아직 갇혀 있다”며 씁쓸해했다.

당시 SVB 회장 겸 대표였던 베커가 회사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2월 한 행사에서 기자가 베커에게 채권 손실에 관해 묻자 “채권을 팔 이유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2월 27일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에서 연락받으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SVB의 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유동성 우려도 있었지만, SVB가 골드만삭스에 자본 확충(신주 발행)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데에는 무디스의 전화 한 통이 컸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채권으로 돈은 못 벌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면 원금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채권 등을 담보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돈을 빌릴 수는 없었을까. (이는 SVB 파산 이후 미 금융당국이 내놓은 대책과 같다. 해외에서는 대책을 일찍 썼으면 SVB가 문 닫지 않았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동아일보

10일(현지 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에서 경찰관들이 나오고 있다. 이날 SVB는 사실상 파산했다. 샌타클래라= AP 뉴시스


● “SVB에 대한 사랑보다 두려움이 컸다”

그럴 틈이 없었다. 온라인으로 돈을 옮기는 ‘스마트폰 뱅크런’에 SVB는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달려가는 시간조차 벌지 못했다.

벤처 대표이자 SVB에 돈을 맡겼던 알렉산더 토레네그라에 따르면 9일 오전 9시경 스타트업 임원 200여 명이 있는 온라인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끊임없이 알림이 울렸다. SVB 주가가 내려가자 은행이 위험한 것 아니냐고 우려가 쏟아진 것.

한 시간 뒤, 누군가 돈을 찾자고 제안하자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은 너나없이 돈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시 ‘커버리지 캣(미 보험 스타트업)’ 창업자 맥스 조는 미 몬태나주 보즈먼 공항에 있었는데, 스마트폰 덕분에 예금을 옮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뛰어가 줄을 서는 모습은 없었지만, SVB에선 하루 만에 55조 원이 빠져나갔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 ‘실리콘밸리가 만든 체계에 실리콘밸리가 당했다’는 기사에서 과거 금융 위기 때는 소셜미디어가 큰 변수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번개 같은 속도로 각종 소식을 전 세계에 퍼뜨려 ‘대규모 예금 인출(뱅크런)’을 일으켰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대부분의 고객이 소액을 맡기는 일반인이 아니라 ‘회사’였기 때문이다. SVB에 예금한 스타트업들은 예금자 보호 한도인 25만 달러(약 3억3000만원)까지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이를 넘는 금액은 은행이 망하면 못 받을 가능성이 있다. SVB 총예금의 95%가 예금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고객 대부분이 경쟁자들의 움직임에 민감한 실리콘밸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뱅크런 전염성이 강했다는 분석도 있다.

블룸버그는 9일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VC 업계 사람들만큼 무리 지어 행동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면서 SVB의 고객 다양성 부족을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

SVB 파산에 뒤늦게 죄책감을 내비친 스타트업 관계자들도 있었다. 자신들이 스타트업의 ‘대부’ 역할을 해 온 SVB를 배신했다고 느끼는 듯하다. 보안 업체 딥센티넬의 데이비드 셀링거 CEO는 “‘죄수의 딜레마’ 같은 상황이었다. SVB에 대한 사랑과 열망보다 두려움이 앞섰다”고 전했다. 자신만 은행에서 돈을 못 뺄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두운 영화관에서 “불이야” 소리만 듣고 달려 나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스타트업들의 행동은 본능에 가까웠다. ‘스마트폰 뱅크런’ 역시 은행이 대비했어야 할 일이었다. 미 은행 뱅코프의 전 회장인 다니엘 코헨은 “은행들은 항상 고객의 충성도를 과대평가한다”며 “이를 대비하는 것이 은행의 기본 업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

10일 SVB 본사 앞에 몇몇 사람이 모여 있다. (왼쪽 사진) ‘스마트폰 뱅크런’으로 과거와 같은 인파는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은 2007년 9월 영국 노던록 은행이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다수의 고객이 지점에 몰려든 모습.  샌타클래라=AP 뉴시스, 트위터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은행보다 ‘실리콘밸리’에 가까웠던 SVB

SVB가 연준을 원망하고 있을 수 있다. 특히, 제롬 파월 연준 의장.

2021년 파월이 “물가 급등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오판한 바람에 SVB가 고금리를 대비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만약 파월이 금리를 일찍, 그리고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다면 (일을 제대로 했다면) SVB 역시 장기 채권에 그만큼 쏟아붓지 않았을 수 있다. 물가가 빠르게 잡혔다면 금리가 지금처럼 높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연준이 자신의 (인플레이션) 판단 착오 때문에 SVB 사태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SVB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투자 포트폴리오가 장기 채권에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은행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리스크 대응이나 조직 관리에 소홀했다는 점이다.

지난해 SVB에는 이 같은 위험성을 포착할 최고위험관리책임자(CRO)조차 없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1월 초 SVB는 갑자기 CRO를 뽑았다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는데, 두 달 후 “사실, CRO 자리가 지난해 4월 이후 비어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은행이 리스크 대응 책임자 자리를 한참이나 비워뒀다.

심지어 지난해 CRO는 사임 전에 성소수자 직원을 위한 캠페인을 담당했었다. 리스크 대응에 몰두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SVB는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직원 8500여 명 대다수가 재택근무 중이었다. 다수의 IT 기업이 직원들을 사무실로 되돌린 최근에도 SVB는 이를 유지했다.

베커 전 CEO는 종종 하와이에서 일했고, 지난해 그만둔 CRO는 워싱턴에, 사내 변호사는 뉴욕에서 주로 근무했다. 전직 SVB 행원은 “직원들도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등 곳곳에서 일했다. 심지어 숲속 오두막으로 이사한 직원도 있었다”고 했다.

20년 가까이 재택근무를 연구해온 니콜라스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는 “화상 회의에서 회사의 리스크를 대응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금리가 오르는 것 같은 변화를 포착하고 대비하는 것은 대면 회의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나온다”고 했다.

SVB의 한 전직 임원은 “마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서 교육으로 ‘테드(TED)’ 강연을 봤던 것을 회상했다. 그는 “미국 금융가처럼 거칠고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분위기보다는 실리콘밸리 IT 회사에 일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동아일보

2일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한 벤처캐피털(VC) 행사에서 케이트 클라크 더 인포메이션 기자(왼쪽)가 그레그 베커 전 SVB CEO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베커는 인터뷰에서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최고의 금융 파트너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다”고 했다. 베커의 회사는 8일 후 파산했다. 케이트 클라크 기자 트위터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SVB가 망한 진짜 이유

SVB가 파산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

미 의회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재정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스트레스 테스트’ 등을 도입(도드-프랭크 법)했다. 그런데, 의회가 2018년에 더 엄격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는 은행 자산 규모 기준을 500억 달러 이상에서 2500억 달러 이상으로 완화해줬다. 초대형 은행들만 규제받도록 느슨하게 규제를 풀어준 것이다.

이는 중소형 은행들이 수년간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한 결과였는데, 당시 앞장섰던 인물 중 한 명이 베커 전 CEO였다. 그는 2015년 미 상원에서 의원들에게 “SVB는 높은 신용도로 금융 위기도 극복했다. 회사가 금융 시장에 리스크가 되지 않으니 규제 부담을 줄여 달라”라고 요청했다.

2017년 말 SVB 자산 규모는 512억 달러. 2018년 규제가 완화되지 않았다면 더 엄격한 감독을 받고 있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파산에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베커 전 CEO는 SVB가 파산하기 열흘 전인 지난달 27일 모회사 SVB파이낸셜 주식 1만2451주(약 360만 달러·47억 원)를 매각해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열렬한 사이클리스트로 알려진 그는 파산으로 해고된 이후 자신이 종종 원격 근무했던 하와이 마우이섬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일등석을 이용했다.

이어 베커 전 CEO가 침실 세 개와 화장실 세 개가 딸린 310만 달러(약 40억4000만 원) 수준의 별장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별장 안에는 테니스장과 클럽하우스, 수영장 3곳도 있다. 최근에는 베커 전 CEO가 은색 미니쿠퍼 컨버터블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점심으로 치즈버거를 사 먹는 장면이 포착됐다.

자신이 전 세계 금융 시장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모습이다.

김성모기자 mo@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