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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 (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K-학원 갑질’…조앤·엠마 선생님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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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민 강사들 “한국에서 나는 고용주의 소유물”

한겨레

전국민주일반노조가 15일 연 ‘원어민 강사 노동실태 증언 기자간담회’에서 원어민 강사들이 자신이 겪은 노동권 침해를 설명하고 있다. 방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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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과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이렇게 불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원어민 강사들을 얼마나 비인도적으로 대하던 간에 우리는 웃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오늘로 끝날 것입니다.”

7년 째 한국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하고 있는 조앤 선생님이 이렇게 선언하자 강당을 메운 50여명의 원어민 강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쳤다.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일반노조)에 가입한 국내 원어민 강사들이 15일 서울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원어민 강사 노동실태 증언기자 간담회’를 열어 이주노동자로서 자신들이 겪고 본 차별과 폭력, 사생활 침해, 임금 체불, 부당한 업무 지시 등 노동권 침해 사례를 증언했다.

회화지도 비자(E2)로 한국에 머무는 원어민 강사는 2021년 기준 1만3196명이다.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7개 국가 시민이 대부분인데, 보통 자격증을 취득한 뒤 외국어 학원이나 학교와 고용 관계를 맺고 한국에 온다. 이날 증언에 나선 원어민 강사 7명은 여느 이주노동자처럼 체류 자격에 대한 불안, 고용주의 절대적인 권한, 낯선 한국 노동법 체계 앞에 “폭력과 억압을 감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사들은 신변에 대한 불안 탓에 마스크를 쓰거나 각자 정한 가명으로 증언을 이어갔다. 영어로 이어진 증언 가운데서도 ‘학원’, ‘원장’ 같은 단어만은 한국어로 또렷하게 발음했다.

미국 출신 케이(K)씨는 ‘I don’t feel safe’(안전하지 않다)라는 문장을 띄운 스크린 앞에서 얼마 전 경험을 이야기하다 흐느꼈다.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는데 암일 가능성이 큰 종양을 긴급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어요. 가장 좋은 날짜는 학원 원장이 (연차를) 거부했고, 원장이 마음대로 정한 날짜에 병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내 의료 기록을 의사와 원장이 나 몰래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고용주의 소유물입니다. 독립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엠마는 갑자기 발병한 자가면역 뇌염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과정에서 자신이 학원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엠마는 “고용주가 세금과 건강 보험료를 내지 않으려 저를 자영업자로 등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를 개인 사업자로 등록해 노동 관계 의무를 지지 않는 ‘가짜 사업자’가 원어민 강사에까지 퍼진 것인데, 고용 관계를 전제로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에게는 체류 자격을 상실할 위험까지 더해진다.

원어민 강사들은 임금을 현금 대신 상품권으로 지급하고, 토익 강의나 영어 수학 강의 등 회화와 상관 없는 수업을 강요 당하거나,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등의 불법 행위도 겪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온 니콜라스는 “학원이 연차 수당과 퇴직금을 모든 선생님들에게 오랫동안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노조의 법률 자문을 구해서 체불 임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학원의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원어민 강사들은 법률 상담 등을 하는 과정에서 지난해부터 알음알음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현재 마흔 명 정도가 일반노조에 가입한 상태라고 한다. 일반노조에는 경비 노동자, 청소 노동자 등 주로 기존 노동조합의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 노동자들이 가입한다. 이날 증언대회에는 조합원 뿐만 아니라 노조 가입에 관심을 가진 원어민 강사들도 참석했다. 조앤은 “오늘 나온 차별과 불법은 원어민 강사라면 누구나 겪거나 보았을 일들”이라고 말했다.

일반노조는 원어민 강사 분회를 만들어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일반노조 서울본부 박정직 조직차장은 “기본적인 노동법 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태라 우선 불법 사례들을 유형별로 모아 매뉴얼을 만들고, 조직을 키워 노동 조건을 두고 단체 교섭까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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