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30 (토)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폭언·욕설에도 '감점 받을라'… 민원인 갑질 여전히 속수무책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감정노동자법' 5년 지났지만

은행지점 급감·AI 상담 도입 영향

고객 불만 복잡·다변화로 속앓이 ↑

우울증·방광염에 몸 건강도 악화

아웃바운드는 상담사 보호제 전무

"은행 추심업무 땐 기본이 욕설"

악성고객 제한 등 개정안은 계류

“상담을 잘 끝내도 ‘번거로우시겠지만’ 이 한마디를 빼먹으면 감점이에요.”

하나은행 콜센터의 한 용역사 소속 5년차 상담사 이영선(47)씨는 일을 시작한 이후로 아이들의 공개수업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하루 3명 이상의 상담사가 연차를 동시에 내면 상담률에 차질이 생겨서다. 오랜 시간 전업주부로 일해온 이씨는 적은 돈이라도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에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매일을 견디고 있다. ‘죄송합니다’, ‘불편하시겠지만’ 등 회사가 지정한 ‘고차원 공감호응어’를 연발하며, 고객의 폭언과 욕설도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고객 만족을 최우선시하는 회사 방침상 고객 불만이 해결될 때까지 이씨는 잠도 제대로 못 잔다. 우울증, 방광염 등 이씨와 주변 상담사들의 몸과 마음은 자주 무너져 내린다.

세계일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폭언·욕설 등의 고객 갑질로부터 고객응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업주의 문제 예방·해결 등을 의무화한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 5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2018년 10월18일 개정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민원인 갑질에 시달리며 정신 및 신체 건강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이 적잖다. 특히 금융권 콜센터 상담사들의 경우에는 대형은행 지점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인공지능(AI) 상담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한층 복잡해진 업무와 고객 불만에 내몰리고 있다.

18일 국민의힘 유의동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시중은행 5곳의 폐쇄된 지점은 총 651개다. 지점 폐쇄 수는 하나은행 160개, 국민은행 159개, 우리은행 152개, 신한은행 141개, 농협은행 39개 등이었다. 이로 인해 콜센터로 들어오는 고객 문의와 불만도 복잡·다변화됐다는 게 현장의 토로다.

세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씨는 “(은행)지점이 많이 없어지면서 일이 몰리니 콜센터로 상담을 넘길 때가 많다”며 “콜센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결국 다시 지점으로 가셔야 한다고 안내를 드리면 불같이 화를 내는 고객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의 대출 만기·연체 안내 등 추심업무를 맡고 있는 권금정(50)씨는 “추심 업무는 기본적으로 전화를 거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예민해진다”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해도 욕설은 기본이고, 미납 시 따르는 불이익 고지가 기분 나쁘다며 1시간씩 전화를 안 끊는 고객도 있다”고 한숨지었다. 그러면서 권씨는 “추심 안내콜은 고객이 끊어버리면 실적으로 처리도 안 된다”며 “내부 콜센터는 고객의 욕설이 시작되면 ‘경고문구’를 내보낼 수 있는 장치라도 있지만, 콜센터에서 직접 전화를 거는 아웃바운드 콜센터에는 아직 상담사 보호 제도가 전무하다”고 씁쓸해했다.

세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 5주년을 맞이했음에도 이처럼 법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법안 재개정 시도도 있었지만 진전은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 등 14명의 의원이 지난 1월 발의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욕설·폭언으로 3회 이상 업무 중단시킨 악성고객 이용 제한 △근로자 대표의 요청이 있는 경우 악성고객에 대한 사업주의 고발 의무화 △상시적 고충처리기구 설치 및 원청(도급인) 안전조치 강화 등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실효성 있는 대안을 담고 있지만, 지난 3월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한 번 논의된 이후 현재까지 계류 중이다.

김나현 기자 lapiz@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