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한국의 산업재해(이하 산재)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그러나 여전히 심각한 문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는 산재로 인한 사망 통계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산재 사고 사망률은 만 명당 0.43명으로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다섯 번째로 높으며, 지난 20여년 간 한국은 해당 항목에서 거의 매해 1위를 차지해 왔다. 2022년 1월 시행되어 심각한 산재 발생에 대한 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법)'은 산재와 국민 안전에 대한 큰 문제의식을 사회 전반이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정치적 논의는 정치권과 사업주를 대표하는 이익집단의 이해득실에 가려 충분히 깊이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사업주가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의 규정을 지켜 산재를 방지할 동기를 강화하는 법이다. 그러나 제도가 그 취지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외부적인 인센티브의 변화 이상이 필요하다. 사업주가 중대재해법의 적용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비용을 감축하기 위해 고용을 줄이지 않을까? 재해 예방보단 처벌을 피하기 위한 법적 자문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쏟지 않을까? 해결책을 고민하고 시도하려는 움직임보단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모두 해결할 하나의 단순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꼽자면, 사내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이 산재 예방을 위해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는 시스템을 만들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고용주가 안전 조치를 실제로 시행하도록 감시하고, 외부자가 예상하기 어려운 사업장의 고유한 위험 요인에 관리자와 노동자가 협력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이다. 이러한 소통 기구를 만드는 것은 산안법에 명시된 새로울 것 없는 아이디어이며, 처벌 조항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대재해법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는 실제로 노동자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
오늘 소개할 연구는 방글라데시의 의류 공장에서 사내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관리, 감독하는 것이 노동자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다(☞논문 바로가기: 다국적 기업의 노동법 집행: 산업안전보건 위원회 강화에 대한 실험적 증거). 방글라데시 의류 공장의 작업 환경은 악명 높은데, 특히 1134명의 희생자를 낸 2013년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사고 이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설립을 의무화하는 등 노동법의 안전 규정을 강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회 설립이 노동조합 조직과 단체교섭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사업주들은 법을 잘 지키지 않았다. 이 의류 공장들은 중국, 베트남 등지의 공장들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다국적 대기업들의 제품을 생산하는 하청 업체다. 소비자의 비난 여론과 투쟁에 등 떠밀린 다국적 기업들은 하청 업체가 노동법 개정안을 따르도록 정부 대신 압력을 넣기 시작한다. 연구자는 이 다국적 기업들과 협업해, 84개의 공장 중 무작위로 선정된 절반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교육과 관리, 감독 프로그램을 실험하고 그 효과를 평가했다.
효과 평가는 프로그램 시작 3~4개월 후의 단기 효과와 10개월 후의 장기 효과로 나누어 이뤄졌다. 우선 단기적으로, 관리, 감독 프로그램으로 인해 하청 업체들은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도와야 할 법적 의무를 더 잘 지켰다. 법적 의무를 지키는 정도는 여러 측면에 대한 평가를 합산한 점수로 측정했는데, 이 점수가 표준 편차의 0.22배만큼 증가했다. 특히 프로그램이 시행된 업체에서 위원회가 더 자주 모이고, 사업장 내 위험성 평가도 더 자주 진행해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프로그램 시행으로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활발하게 작동한 결과, 작업장 안전과 노동자의 건강도 개선되었다. 작업장 안전 및 안전 인식 점수가 표준 편차의 0.16배 좋아졌고, 직장 내 의료 시설 이용률은 15~16% 줄어들었다. 다만 산재율은 약간 증가했는데, 이는 정도가 가벼운 산재의 증가에서 비롯해 위원회의 활동으로 노동자가 더 적극적으로 산재를 보고한 결과로 보인다. 반면 직장에 대한 만족도 점수는 조금 나빠졌는데, 노동자 스스로 보고한 직장 만족도는 줄어들었으나 결근이나 이직이 증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긍정적 효과가 고용, 임금, 그리고 임금 이외의 복지를 줄이는 부작용을 수반하지는 않았다. 작업장 안전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부담에 대응하기 위해 사업주가 직원을 덜 뽑거나 노동자의 임금을 깎는 방식으로 비용을 전가해서, 오히려 ‘민생’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재계의 흔한 우려가 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프로그램을 통해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활성화하는 것이 노동자의 생산성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선 통계적으로 유의하진 않으나 프로그램 시행이 오히려 생산성을 개선하는 결과를 발견해, 적어도 생산성을 2.3~3.4% 이상 낮추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10개월 후 다시 관찰했을 때에도 결과는 유사했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 활성화 프로그램이 하청 업체들로 하여금 법적 의무를 더 잘 지키도록 만들고, 노동자가 마주하는 작업장 안전을 개선하는 양상이 유지되었다. 다만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은 업체들에서도 시간에 따라 개선이 이뤄지며, 두 집단의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진 않았다. 단기적으로 나빠졌던 직장 만족도는 역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진 않으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섰다. 노동 생산성이나 임금, 고용은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논문을 읽으며, 저자가 사업장 내의 실질적 변화와 법의 변화, 서류 상의 변화를 날카롭게 구분하며 정책 실험을 통해 그 틈을 메우고자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은 통제 집단에도 형식상의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존재했으나, 위원회가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현저히 달랐다. 사람 하나하나에 닿는 변화를 만드는 일은 그런 일이다. 올해 초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유예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논쟁에서 정부와 여당이 앞장서 법안에 대한 오해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우선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중대재해법 확대가 법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마주하는 노동 환경을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바꾸는 실질적 변화가 되도록 구체적인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서지 정보
Boudreau, Laura. (2022). "Multinational enforcement of labor law: Experimental evidence on strengthening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OSH) committees," CEPR Discussion Papers 17579, C.E.P.R. Discussion Papers.
▲지난해 12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 취약분야 지원대책 당정협의회 회의장 앞에서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씨 등이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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