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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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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졸속黨의 최후… 창당 5년 만에 파산했다 [방구석 도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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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새 당명 9번 바꾼 ‘反NHK당’

전·현직 대표 싸움에 파산까지

전직 의원은 협박으로 유죄판결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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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본 모처에 붙어 있는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스티커. 공영방송 NHK 수신료를 걷기 위해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는 수신원의 방문을 거부하는 상징적인 용도로 쓰인다./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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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유학 시절 신주쿠 한 호텔에서 일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남성이 찾아와, 데스크에 서 있는 제게 “이곳에 혹시 TV가 있느냐”고 대뜸 물었습니다. 일본인 직원을 불러 응대를 부탁했는데, 그는 의문의 남성을 내쫓더니 제게 호텔 문 앞에 있는 스티커 하나를 보여주더군요. 그 스티커는 일본 정당인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의 공식 로고였습니다. 공영방송 NHK의 수신원을 내쫓기 위한 일종의 표식 같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일본에선 NHK 수신료를 걷으러 다니는 이른바 ‘수신원’이 존재하고, 일본인 대다수가 이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로 서른 번째를 맞이한 방구석 도쿄통신은 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에 대한 이야길 해보려 합니다. 공영방송 수신료 징수에 대한 국민 반감을 등에 업고 국회 의석까지 차지했었지만, 창단 5년 만에 파산을 맞았습니다. 일본에서 공식 정당이 파산하는 건 35년 만인데다 파산의 원인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대표직을 두고 벌어진 전·현직 간부들의 ‘개싸움’에 있어 더 화제입니다.

조선일보

NHK 직원 출신으로 2013년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란 정당을 출범해 지난해까지 당대표를 맡은 유튜버 겸 정치인 다치바나 다카시(57)/슈칸분슌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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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일본 도쿄지방법원은 정당 ‘모두가 만드는 당’(이하 모두당)에 파산 개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부채 총액은 약 11억엔(약 98억원). 이로써 당은 당분간 내부 예산을 자유롭게 쓸 수 없고 운영권도 파산관재인에 사실상 넘겨주게 됩니다. 지난 1월 다치바나 다카시(57) 전(前) 당대표를 비롯한 당 후원자와 과거 집행부 임원들이 합심해 ‘채권자 파산신청’을 제기했기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정당은 어쩌다 전임 대표의 주도로 파산이라는 파국을 맞이하게 됐을까요.

NHK 직원 출신인 다치바나는 2005년 한 주간지에 내부 비리를 폭로했다가 퇴사, 이후 NHK가 연루된 문제들을 비판하며 2013년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란 정당을 출범시켰습니다. 2019년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의석 1석을 차지하며 정당조성법상 공식 정당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치바나가 직접 국회에 입성해 ‘NHK를 때려 부순다’는 과격한 구호를 내걸고 NHK 내부 횡령 등 비리를 폭로하면서 인기를 끌었죠. 주요 공약이었던 ‘NHK 수신료 폐지’를 성사시키진 못했지만, 일본 국민 대다수도 NHK 수신료 징수에 불만을 품고 있어서 여론의 지지를 얻는 덴 성공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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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튜버이자 2022년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히가시타니 요시카즈(활동명 '가시')가 지난해 일본에 입국하고 곧바로 체포되는 모습. 그는 지난해 3월 국회에서 제명됐다./ANN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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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22년 7월 유튜버 출신 히가시타니 요시카즈(53·활동명 ‘가시’)가 당 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됐던 것이 문제의 시초가 됐습니다. 히가시타니는 과거 유튜브 활동을 위해 연예인 등 유명 인사들을 수차례 협박한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었고, 이에 해외 도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선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국회에도 등원하지 않아 결국 지난해 3월 국회에서 제명됐죠. 이 책임을 떠안고 다치바나가 같은 달 대표직에서 내려왔습니다.

이후 아역 배우 출신인 오츠 아야카(32)가 후임 대표가 됐습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당명을 ‘정치가 여자 48당’으로 바꿨습니다. ‘반(反)NHK’라는 전통적인 당 색깔을 버리고, 여성권 위주의 정당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죠. 이 당명 변경을 두고 당내 갈등이 벌어지면서 오츠는 취임 한 달 만에 당에서 제명됐습니다. 후임 당대표는 히가시타니의 후임으로 국회에 입성했던 사이토 겐이치로(44). 다치바나는 당수(黨首)라는 직책으로 복귀했죠. 오츠는 제명 결정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당국이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지난해 9월 대표직에 복귀했습니다. 오츠 대표는 지난해 11월 당명을 현재의 ‘모두당’으로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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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반(反)NHK당' 대표가 된 아역 배우 출신 오츠 아야카(32)는 취임과 동시에 당명을 ‘정치가 여자 48당’으로 바꿨다. 당을 여성권 위주의 정당으로 변신시키려 한 것이다. 이 당명 변경으로 인한 갈등으로 오츠는 취임 한 달 만에 당에서 제명됐다./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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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당 '모두가 만드는 당' 로고를 들고 있는 오츠 아야카(32) 대표/당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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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모두당 소속 의원이었던 사이토와 의사 출신 하마다 사토시(47) 등 두 명이 오츠가 아닌 다치바나의 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올 1월 일본 총무성이 실시하는 정당교부금 수급 신청서에 고의로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두 의원은 같은 달 당에서 제명됐고요. 모두당은 의석수가 제로(0)가 되며 정당조성법상 정당 요건을 상실했습니다.

사이토·하마다 의원이 징계를 무릅쓰면서까지 정당교부금 신청서에 서명하지 않은 건, 사실상 뒷배에 다치바나가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입니다. 다치바나는 오츠와의 ‘대표직 싸움’에서 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을 지지하는 당 후원자와 집행부 임원들을 모아 당에 채권자 파산신청 제기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갖지 못한다면 무너뜨리겠다’는 심보죠. 실제로 오츠가 대표직을 유지하자, 다치바나가 채권자 333명을 모아 당에 약 11억엔의 채무를 주장하며 지난 1월 법원에 파산신청을 한 것입니다. 오츠가 이끄는 모두당은 절차대로 이뤄졌다면 받을 수 있었던 약 3억3000만엔의 올해치 정당교부금을 받지 못한 상태라, 파산신청에 무력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츠는 당이 현재 보유한 자산 3억엔은 물론 실질적인 당 운영권도 빼앗기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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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겐이치로(44) 일본 참의원 의원/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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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다 사토시(47) 일본 참의원 의원/산케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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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는 14일 “(당 운영권은) 실질적으로 빼앗겼으나 오늘 파산 결정으로 오츠가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없게 됐다”며 자축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오츠는 “채권자들이 정당한 권리에 근거해 이익을 도모하려 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결정에 불복하고 항고하겠다”는 입장문을 냈습니다.

2013년 ‘NHK 수신료를 내지 않는 당’으로 탄생한 이 당은 2019년 공식 정당으로 인정받은 뒤 현재까지 약 5년 사이에만 당명을 9번이나 바꿨습니다.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NHK 수신료를 지불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당’ 등 큰 의미 변화도 없었죠. 2020년 11월엔 별안간 골프장 이용비 문제를 끌고 와선 ‘골프당’으로 당명을 바꾸겠다더니, 당 안팎의 뭇매를 맞고 철회했습니다. 이후 ‘NHK로부터 자국민을 지키는 당’으로 바꾸고 약칭을 집권 여당과 같은 ‘자민당’으로 쓰겠다 했다가 당국 제지로 번복한 적 있습니다. 이러한 빈번한 당명 변경은 효과를 보긴커녕 지지자들에게 피로감만 줬다는 비판이 잇따릅니다. 오츠는 지난해 11월 당명을 모두당으로 바꾸면서 “앞으론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한편 국회 불출석 문제로 의원직을 상실했던 유튜버 출신 히가시타니는 당이 파산한 14일 같은 도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과거 사업가 시절 맺어 온 연예계 인맥을 활용해 유명 스타들의 비위 행위를 고발하는 유튜버로 활동했던 그는 2022년 2~8월 영상 제작을 위해 유명 배우 등 4명을 상습 협박하는 등 폭력 행위를 저질렀던 혐의로 이러한 선고를 받았죠. 법원은 “(피고는) 스스로를 안전권에 두며 피해자들에게 비방의 물결을 퍼붓는 비열하고 악질적인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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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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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서른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일본에서 벌어진 실속 없는 당(黨)의 내부 불화와 이로 인한 파국 사태까지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28~29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떠나는 길, 쓸쓸히 가긴 싫어” 日노인들은 요즘 ‘무덤친구’ 사귄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3/06/IZ6QC7HYRZEIZDN4RRWQHIRJUI/

“엄마가 신 아닌 날 사랑해 줬다면...” 日신흥종교 문제, 영화로 나온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3/13/2UX62MMGLJFWZJF2HWODW3TD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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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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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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