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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나는 내시경…서울의 항문 속에 들어간 청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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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4전국대전 현실유머’전에 나온 강승호 작가의 16분짜리 단채널 영상작품 ‘: o scopy’(2023). 도시의 항문에 비유할 수 있는 하수구의 좁은 공간을 마치 내시경처럼 투사하면서 그 속에 작가가 끼어들어 가 연인과 통화하고 케이크에 촛불을 생일을 자축하는 일상적 몸짓을 드러낸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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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시경이다!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 젊은 작가의 패기가 땅속을 찌른다. 지난달 국민대 미대를 졸업한 강승호 작가는 지난해 대도시 서울의 항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하 하수도로 캠코더를 들고 들어갔다. 내시경(colonoscopy)처럼, 작가는 좁고 동그란 하수도에 몸을 비비며 집어넣어 도시의 배설물이 흐르는 공간을 훑어보았다. 내시경 센서가 된 자신의 몸짓과 시선을 단채널 영상물로 기록했다.



그렇게 나온 16분38초짜리 이 영상물은 ‘: o scopy(살펴보기)’란 제목을 달고 있다. 서울 은평구 불광역 1번 출구 안쪽 먹자골목에 자리한 대안전시공간 신사옥의 신진작가 기획전 ‘2024전국대전-현실유머’의 주요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장 지하 구석에 따로 뚫린 골방 공간의 계단 위쪽에서 스티로폼 스크린에 투사해 선보이고 있는 이 영상물은 여러모로 다채로운 해석의 갈래들을 제시한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공간’인 하수도에서 작가는 탐색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연인과 휴대폰으로 통화하면서 밀어를 속삭이거나 다투기도 하고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아놓고 축하하기도 한다. 이런 일상 행위를 함께 벌이면서 이뤄지는 탐색 과정에서 하수도는 새로운 공간예술의 현장이자, ‘헬조선’을 절규하는 청년세대의 울분과 비애를 함축한 장소다.



한겨레

박예원 작가의 10분30초짜리 설치 영상물 ‘평생 후원 이사’(2023). 경기도 파주에서 서울 당산동 쪽의 초단기 임대원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전거에 짐을 싣고 달리는 작가의 ‘무식한 이사노동’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영상 주위를 실제로 이사하면서 썼던 단프라박스 더미로 둘러싼 얼개가 이채롭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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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진행 중인 ‘전국대전’은 전국 각 지역 미대를 갓 졸업한 새내기 작가들의 졸업전시 출품작 가운데 현실 풍자적인 작품을 골라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부부 옥정호·이지영씨가 지난해 11~12월 열린 전국 55개 미대 졸업 전시를 86차례 찾아가 작품을 추려냈다. 줌 인터뷰를 포함한 세 차례 심사과정을 거쳐 참여작가 26명을 뽑았다고 한다.



현실 유머란 부제에서도 짐작되지만, 출품작 중 상당수가 강렬하고 기발한 풍자적 작품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박정아 작가는 건강상태를 예측하는 유전자 검사가 유행하는 데 착안해 과학적 검사와 지구 나이 45억년 정보를 토대로 점집에 지구의 신수를 물어본 작업의 단면 등을 병치한 영상을 만들었다. 과학과 역술의 근접한 관계를 캐묻는 작가의식이 예사롭지 않다.



홍대 출신 박예원 작가는 설치 영상물 ‘평생 후원 이사’를 틀어준다. 경기도 파주에서 서울 원룸으로 거처를 옮기며 자전거에 짐을 싣고 달리는 작가의 생생한 ‘이사노동’ 과정을 10분30초짜리 영상에 압축 기록하고 이 영상 자체를 이삿짐 상자로 둘러싼 설치작품 얼개로 보여주며 청년작가의 일상적 고뇌를 담담하게 전해준다.



서울대 출신 권영재 작가의 6채널 영상물 ‘기투하는 신체’도 흥미롭다. 전시장 바닥 근처 벽에 달라붙은 암전된 화면 모니터에 알몸의 남자 모델이 모로 누워 자신의 몸을 툭툭 치면서 화면에 뜨는 문자로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을 표기하는 영상을 통해 감각하는 몸과 인지하는 몸에 대한 사유를 풀어냈다. 전통 불화의 지옥도를 자신의 내면을 풀어놓는 소통의 화폭으로 전화시킨 강릉원주대 출신 서은별 작가의 세로축 대형그림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한겨레

지난 2월28일부터 이달 24일까지 서울 인사동길 무우수갤러리에서 열렸던 기획전 ‘보이는 보이지 않는 생성되는’의 4층 전시 현장 일부. 조미료의 재료인 글루탐산나트륨 덩이로 나뭇잎 더미를 만들어 좌대 위에 설치한 김민정씨의 작품 뒤로 이진솔 작가의 쇳가루 추상화가 벽면에 내걸려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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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작가들은 선배들과 다른 시국을 살았다고 한다. 코로나 사태 영향으로 대학 재학 기간의 절반가량은 실기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정권 교체로 국정 색깔도 달라지다 보니 특유의 현실참여적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옥정호 기획자의 설명이다. 새내기 작가들이지만 팍팍한 현실에 더욱 밀착한 시선과 그들만의 인간적인 해학이 느껴진다.



‘전국대전’ 말고도 새봄 미술판에는 신진·예비 작가들의 연합 기획전이 속속 차려졌다. 지난달 시작해 24일 끝난 서울 인사동 무우수갤러리의 젊은 작가 12인 전 ‘보이는 보이지 않는 생성되는’의 경우 글루탐산나트륨으로 나뭇잎 더미를 만든 김민정 작가의 설치작품과 이진솔 작가의 쇳가루 추상화, 배현우 작가의 자석으로 진동하는 에프알피(FRP∙섬유 강화 플라스틱) 인물상 등이 주목됐다. 지난해 공모에 뽑힌 송수민, 오제성, 최은빈 작가의 개별 전시를 선보인 서울 소격동 금호미술관의 영아티스트 1부전(4월28일까지)도 한국 근현대 조각사를 재구성한 조형물이나 자연·일상·재난 도상이 화폭 위에서 충돌하고 기억과 감정을 빛과 진동으로 변환시키는 등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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