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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떡볶이집에서 슈퍼맨을 기다리다 [이상헌의 바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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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겨레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시인 신동엽은 4월을 “갈아엎는 달”이고 “일어서는 달”이라고 했지만, 계절에도 시간의 이끼가 끼는 것인지 이제 4월은 쓰러지고 묻고 은폐하는 달이다. 그리고 4월은 정치의 달이고 떡볶이의 계절이다. 개표방송에서 호들갑스러운 말과 적나라한 박수가 쏟아지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 떡볶이를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의 첫 기억이 흐릿하다. 겉은 흐벅지게 벌겋고 속은 민망할 정도로 하얀 떡볶이를 처음 마주한 기억이 없고 첫 만남의 맛에 대한 기억도 당연히 없다. 풍경에 대한 엷은 기억만 있을 뿐이다. 큰 동네 길을 내처 달리다가 학교를 향해 꺾인 골목길로 돌아설 때면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멈칫했다. 저 멀리 완장을 찬 선배들과 몽둥이 같은 매를 든 선생님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뛰어서 가쁜 호흡이 한숨으로 바뀌었다. 그 짧은 반전의 시간이 구성되는 곳에 떡볶이집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훤히 열려 있었다. 문도 없이, 기다란 철판에 떡볶이, 어묵, 만두가 쭉 널려 있었으니, 그야말로 환영의 도가니였다. 반긴다는 ‘환영’과 기망한다는 ‘환영’이 원초적 붉음으로 번쩍였다. 가고 싶으나 당장 갈 수 없는, 뭔가 아스라한 약속의 땅이었다. 학교라는 ‘황무지’에서 나오면 우리는 골목의 먼지를 다 몰고 그곳으로 몰려갔다. 물론 그때도 우리라는 말은 기만적이었다. 어린 세상도 떡볶이집에 마음껏 갈 수 있는 아이들과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용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는 세상이었는데, 드물게는 떡볶이를 불량식품으로 여기는 엄마 때문에 출입금지 조치를 당한 아이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분열된 ‘해방’의 공간이었는데, 이 공간을 묶어주는 애들이 있었다. 주머니에 몇푼이 있는 아이들은 빈 주머니만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떡볶이집에 갔다. 애들 주머니 사정이야 뒤바뀌기 마련이니 계산하는 사람도 바뀌었다. 누가 얼마나 낼지를 두고 실랑이도 하면서 들락날락하다 보니 더는 누가 돈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갔다. 누가 정확히 돈을 얼마나 내는지도 몰랐다. 주머니를 털어 나온 것을 모아서 계산하면 그만이었다. 어떤 놈은 필시 한번도 돈을 내지 않았으나 별 상관 하질 않았다. 그냥 몰려가서 먹고 떠들었다. 마치 우리를 언제나 구원해주는 슈퍼맨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곳에서 안전했다. 내가 너의 슈퍼맨이고, 네가 나의 슈퍼맨이었다.



그런 시절이 길지 않았다. 어느 순간 떡볶이가 저들의 음식이 되었다. 우리의 해방공간에 중고등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더니 가게에 좁고 거친 문이 달렸다. 급기야 성가신 골목에서 벗어난 곳으로 장소를 옮겨 가더니 간판도 달았다. 이름은 하얀집. 붉은 떡볶이를 파는 집이 하얀집이었다. 기억하건대, 그때부터 떡보다 더 하얀 삶은 계란이 떡볶이 철판에 등장했다. 저 하얀 것들 때문에 저곳은 더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엄마가 공부 잘했다고 용돈을 조금 더 주는 날이면 혼자 몰래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돈은 없고 떡볶이가 먹고 싶던 날, 나는 가게 앞에서 나의 슈퍼맨을 기다려봤다. 내가 너의 슈퍼맨이 아닌데, 나의 슈퍼맨이 올 리가 없었다.



떡볶이의 반혁명은 계속되었다. 오늘날 떡볶이만큼 정치적인 음식은 없다. 정치적인 사람들은 떡볶이를 찾는다. 혼자 가는 법이 없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것만은 여전하다. 몇달 전 세상의 누구보다 정치적인 사람이 부산의 부평시장 떡볶이 가게를 찾은 적이 있다. 6·25 시절 미군 깡통 제품이 은밀히 거래되던 깡통시장 옆에 있는 곳인데 미군 제품이 사라지자 일본 제품이 대신했다.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친미 시장이 친일 시장으로 대체된 곳인데, 나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나를 키웠다.



그 사람은 가장 ‘경제적인’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떡볶이를 강권했다. “하나씩 잡아요.” 어릴 적 엄마가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을 곳에서 그들은 이제 떡볶이 접시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어색하게 젓가락질을 시작하려고 하니, 그 정치인은 떡볶이를 먹고 나면 돼지국밥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을 ‘선제적으로’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가게 주인에게 빈대떡도 잘라 달라고 한 뒤 재벌총수들에게 마치 술 한잔 권하는 것처럼 빈대떡을 하나씩 접시에 올려준다. 어묵도 먹고 만두도 먹는다. 옛날 근무 시절에 먹던 밀면 얘기도 한다. 일인극 연극처럼 혼자 말하고 답한다. 그 흔한 말, 장사는 잘되냐, 힘든 점 없느냐, 고생 많으시냐는 말은 없다.



새롭게 등장한 어느 젊은 정치세력은 당장 떡볶이를 문제 삼았다. 이른바 ‘떡볶이 방지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떡볶이집에 정치적으로 강제동원되는 경우 경제인들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란다. 떡볶이라는 불량식품으로부터 재벌을 보호하는 것은 이제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이 만든 특별한 법의 몫이 되겠다. 법의 효율성이나 적절성은 모르겠으나, 특별하긴 특별하다. 이럴 땐 참으로 자상하고 알뜰한 정치인들이다.



단원고 앞에도 떡볶이를 파는 데가 있다. 번듯한 가게를 내지 못한 사람들은 노점상을 낸다. 2014년 4월13일, 어느 남학생과 여학생이 떡볶이를 먹으러 왔다. 뻔한 형편이라 1인분만 시켜서 나눠 먹었다고 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붉은 마음을 확인한 다음에 떡볶이 먹는 것이니 그저 좋았다. 아이들은 만난 지 곧 100일이 된다고 자랑했다. 아저씨는 100일 되는 날에 꼭 오라며 떡볶이를 한주걱 더 퍼 주었다. 모두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4월16일.



수학여행 가서 선물 하나 사서 떡볶이 먹으러 오겠다는 아이들은 영영 소식이 없다. 알아보겠다고 부산을 떨던 사람들도 소식이 없다. 특별한 소식은 없다. 정치인들은 여전히 떡볶이 맛을 얘기만 할 뿐 떡볶이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떡볶이를 어떻게 나누는지, 매운맛의 짜릿한 행복과 왈칵 쏟아진 눈물, 무너진 꿈과 새로 키우는 희망을 알려 하지 않는다. 떡볶이는 표 한장을 유혹할 수 있는 손쉬운 도구일 뿐이고, 새빨간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떡볶이가 왜 겁나게 매운지 그들은 영영 알지 못하고,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 슈퍼맨을 기다린다.



(마지막 글이다. 애당초 ‘바깥길’이었고, 떠도는 말이었다. 언제고 떠날 길이었다. 그런 길을 맴돌아 남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웠다. 당신의 건투를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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