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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만물상] 성공한 세습 독재의 평화적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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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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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반도 끝에 붙어있던 가난한 섬나라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에서 1965년 쫓겨났을 때 이 나라 미래는 끝난 듯했다. 변변한 자원도 없었다. 식량과 물도 부족해 말레이시아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나라를 청년 리콴유가 떠맡았다. 1959년 36세로 집권해 31년간 통치하며 물고기잡이로 살던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을 400달러에서 1만27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잘살게 만든 비결로 ‘공포의 효능’을 꼽은 적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범죄자가 교수형 등 엄벌을 받는 걸 보며 “국가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배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태한 국민을 채찍으로 일으켜 세우는 ‘엄한 아버지’ 리더십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마약 사범은 처형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자는 태형으로 다스렸다. 굵기 1.27㎝ 회초리는 석 대만 맞아도 살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해진다.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선고한 매질 횟수는 다 채우는 철저한 법 집행으로 국민 뇌리에 준법 의식을 심었다.

▶장남 리셴룽 총리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국제 금융 지수 3위, 인적 자원 경쟁력 2위 등 모든 국가 경쟁력 지표를 세계 최상위로 올려놓았다. 법인세를 줄이고 상속세를 없애 사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적 기업이 몰려들었다. 2022년 1인당 GDP 8만달러를 돌파해 아버지 때보다 6배 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문화 인프라도 약진했다. 한국에선 7만명을 수용할 공연장이 없어서 무산된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아시아 투어를 올해 초 유치해 동남아 전역의 팬을 불러 모았다.

▶성공의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잘사는 북한’ ‘사형 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는 말을 듣는다. 집회·시위·언론의 자유가 없다. 엄벌주의에 대한 불만도 높다. 집권 인민행동당의 인기도 전만 못하다. 2020년 총선에선 처음으로 야당에 두 자릿수 의석인 10석을 내줬다. 갤럽의 국민 행복도 조사에선 세계 148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국민이 변화를 원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리셴룽 총리가 20년 집권을 끝내고 다음 달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아버지의 31년 통치를 더하면 51년간 나라를 번영시킨 ‘리콴유 가문 통치’를 스스로 끝내는 것이다. 세습 독재가 성공하는 것도, 그 독재가 정변 없이 물러나는 것도 유례가 드물다. 리콴유는 생전에 “인생의 마지막 날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싱가포르의 성공”이라고 했다. 물질적 풍요에 이어 정치 민주화에도 성공하기를 하늘에서도 바라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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