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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휠체어를 탄 멋진 언니들이 말했다 “계속하니 되던데”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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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지우 작가(왼쪽)가 장애 패션 브랜드를 론칭한 사업가로 일하고 있는 박다온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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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
휠체어 탄 여자가 인터뷰한 휠체어 탄 여자들
김지우 지음 l 휴머니스트 l 1만8000원



20대에 중도장애인이 되기 전 윤선씨는 자전거 전국 일주도 하고, 산악 지프차도 타고,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전국 문화유적 답사를 하던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근육병으로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아득해졌을 때, 지인들이 인도 여행을 간다는 거다. 여행 코스 중에는 그가 너무나 가고 싶어했던 타르사막이 포함돼 있었다. ‘무조건 가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따라나섰다. 밤이 되면 사막이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 뻔하고, 화장실이 없어서 모래에 무릎을 꿇고 대소변을 봤다. 하지만 행복했다. “이렇게 누워 있잖아요. 별이 얼마나 많은지 별에 맞아 죽을 것 같은 거예요. ‘내가 죽기 전에 한 번 더 올 수 있을까’ 이 생각도 들고,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와야지’ 결심하기도 했어요.”



웬만한 여행 전문가에게도 고행길인 인도 여행을 마치자 무서울 게 없어졌다. 한국에 돌아온 뒤 어떻게 하면 계속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좀 더 가치 있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장애인도 혼자서 여행할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주변에선 ‘장애인이 무슨 여행이냐, 집에서 나올 수도 없는데’ ‘먹고살게 해 줬으면 됐지, 여행은 배부른 소리다’ ‘사지 멀쩡한 사람도 여행 잘 다니지 못하는데!’ 등의 비아냥이 수두룩했다. 무려 20년도 더 전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더욱 힘차게 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관광지들을 모니터링하고 세미나와 사진전을 통해서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장애인 여행객으로 이뤄진 ‘팸투어’를 꾸려서 함께 여행을 다니며 많은 장애인들을 여행으로 이끌었다. 그가 정동진에 처음 갔을 때 들어간 식당은 그를 구걸하는 사람인 줄 알고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던지고선 식당 문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몇년 뒤에 갔더니 식당은 ‘휠체어도 들어올 수 있다’며 환대했고, 그다음에는 경사로까지 설치해 놓았단다. 이 모든 게 그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무장애 여행’을 소개하고 책을 쓰고 민원을 넣은 덕분이다.



휠체어를 탄 언니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연애하고 출산하며, 또 늙어가는 걸까? 또 차별과 동정의 시선은 어떻게 견디며 종종 찾아오는 소진감이나 무기력감은 어떻게 해결하는 걸까? ‘우리의 활보는 사치가 아니야’는 이 같은 질문을 가진 김지우 작가가 6명의 휠체어 탄 언니들을 만나 엮은 인터뷰집이다. 작가 역시 휠체어를 탄 20대 ‘언니’로,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과 여러 책을 통해 휠체어를 굴리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난 ‘언니’들은 10대부터 60대까지, 소녀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지민씨는 ‘한겨레’에 칼럼을 쓰며 환경에 목소리를 높이고 학교 밖 청소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청소년 활동가다. 성희씨는 수영과 럭비를 거쳐 스키를 타는 장애인스포츠 선수다. 서윤씨는 한국방송(KBS)의 첫 여성 장애인 아나운서로 정치 현장 곳곳에서 장애 여성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온씨는 아이를 키우며 전국을 누비는 우수 영업사원에서 장애 패션 브랜드 사업가로 변신한 이다. 효선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 대학을 거점으로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특수교육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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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활동가 유지민씨(왼쪽)와 김지우 작가가 손바닥을 보이며 아래를 향해 브이를 그리는 ‘갸루피스’ 포즈를 취하고 있다.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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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들이 자신의 장애를 어떻게 극복하고 남다른 성취를 이루었는지에 대해 조명을 비추거나 아직 멀디먼 장애인권의 현실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방점은 그들이 어떻게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춤을 추고 소풍과 여행을 떠나며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어떤 일을 벌이고 성장해왔는지다. 저자에게 누구도 장애가 있는 채로 어른이 될 미래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중장년 그리고 노년의 삶이 너무나 궁금해서 떠난 인터뷰 여정이었다.



그 여정에서 만난 이들은, 독립을 만류하는 부모의 품을 떠나서 더 신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고, 이혼과 사별이라는 생의 파고를 거치면서도 당당한 엄마로 자부심을 빛내며 살아가고 있었고, 점점 더 악화되는 건강에도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다하며 유머러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저자가 용기를 얻는 대목들은 거창한 사명감이나 대담한 모험심 또는 묵직한 위로가 아니다. “나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어” “또 갈 수 있겠던데?” “못하는 거 있으면 두드려 보고, 안 되면 말고” “계속 하면 돼” 같은 무심하면서 간결한 언어들이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겁먹지 않고, 그저 덤덤하게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가면서 한번 길을 나서보라는 것.



그래서 인터뷰들은 생기와 활력이 넘치고, 저자의 궁금증을 다 풀어준다. 스무살에 두려운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타봤던,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 냈던 저자는 이제 대만, 홍콩, 일본, 유럽을 거쳐 호주에서 글을 쓰고 있다. ‘한번 가보니 또 갈 수 있겠더라’는 언니들의 말을 실감하고 있다. 장애를 없애야만 행복한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장애와 함께 무사히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걸 목격한 저자의 마음은 살랑살랑 일렁인다. 덕분에 40대의 삶도 할머니의 삶도 무섭지 않게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하지만 이 인터뷰들이 꼭 장애를 가진 후배 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취약함과 연약함은 인간의 본질이다. 또 나눔과 연대는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의 취약함과 연약함이 어떤 영민한 배움과 성장을 주는지, 나아가 어떻게 연대와 나눔이라는 선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책은 너무나 보편적인 인간의 성장담이다. 책을 닫고 나면, 장애 유무를 떠나 ‘힘을 빼고 유연하게, 하지만 당당하고 유머러스하게, 나도 힘들 때 손을 내밀 줄 알고, 남이 내밀어준 손도 기쁘게 잡으면서 가는 것’이라는 삶의 태도만 반짝반짝 남는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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