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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경의중앙선을 위한 변명[소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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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지’ ‘대중고통’ 악평 듣는 경의중앙선

악명 높지만 규정 지켜야 하는 한계도

시민들의 발 되어준 연탄 같은 노선

얼마 전 동생이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서울 지하철 감상평’.
그녀가 내게 이 사진을 공유한 목적은 분명했다. 이번엔 또 얼마나 통렬하게 써놨을까. 거의 설렘 비슷한 감정으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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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어쓰기 생략과 온갖 비표준어를 통해 작성자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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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선, 기가 막히긴 하지. 3호선은 주요 노선이지만 좀 낡은 느낌이 있어. 그래 5호선은 직장인 노선이라 그런지 확실히 깔끔해, 지하가 깊어 시끄러울 때는 있지만. 7호선은 내가 안 타봐서 잘 모르겠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기 마련이다.
“경의중앙·수인분당은 지하철이 아님. 그거는 구루마(달구지)? 수레? 그런 말이 맞음”

● ‘대중고통’ 경의중앙선

그렇다. 내가 기다리던 지하철은―아니 수레나 구루마랬지― 경의중앙선이다. 결혼 전 매일 경의중앙선을 타고 출퇴근했다. 지금은 주로 버스를 타게 됐지만, 여전히 가장 자주 이용하는 노선이다.

경의중앙선의 악명은, 동생이 보낸 짤 정도는 애교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극악의 배차간격과 시간표를 믿을 수 없는 지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참신한 품평을 발견한다. ‘대중교통이 아니라 대중고통’,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철도박물관’, ‘로또 되면 경의선 운영권 사서 폭파시킬거다’, ‘경의선 간격은 영화관 상영 간격보다 더함’….

헐레벌떡 뛰었지만 눈앞에서 열차(차마 ‘지하철’이라고 써지지 않는다)를 놓치고 친구에게 ‘15분 정도 늦을 것 같아ㅠㅠ’ 사죄 메시지를 보내본 사람들만이 가능한 이 신랄함. 이것도 시간표대로 올 때 얘기, 연착되면 20분 되기 십상이지. 덥고 추운 날 지상역에서 기다리자면, 더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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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썰플리〉 지하철썰 편. 남자의 표정이 경의중앙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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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는 심너울 작가의 SF 단편집 〈땡쓰 갓, 잇츠 프라이데이〉에 수록된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였다. (역시 경의선 서강대역에 살던 친구가 공유해줘 읽게 됐다)

주인공은 일산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만류에도 귀갓길로 경의선을 택한다. 도착한 백마역에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들이 자기 목적지를 외치거나 ‘끼긱-’ 열차 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 한없이 경의선을 기다리다 좀비가 돼 역에 묶여버렸다는 상상이다.

“내가 지금까지 10분을 기다렸으니 이제 5분이면 열차가 오겠지.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하루를 기다렸으니… 거기다 시간표가 그런 착각을 강화하기까지 하고요.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이곳에 묶이는 거죠.”

반가웠다가 재밌다가 섬뜩했다가, 단숨에 읽어내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소설은 SNS에서 경기도에서 서울로 통학·통근하는 ‘경의선러’들에게 널리 회자됐다. 일상의 공포가 생생하게 담긴 블랙 코미디, 아니 호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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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 부분 발췌. X(옛 트위터) @ofmyoeuvre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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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 부분 발췌. X (옛 트위터) @knowhater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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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런데 이 마음을 뭐라고 해야 할까. 경의선에 대한 갖가지 풍자에 킬킬대면서도 실은 순도 100% 조롱의 마음이 들진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잘 나가고 능력 있는 친구는 아니지만 내겐 없으면 안 되는 고마운 친구를 비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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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을 들여다보자면 어쩐지 시작부터 기구하다.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위해 1904년 만든 철로. 경성(경)과 신의주(의)를 이었지만 남북 분단으로 달리지 못하는 반쪽 철길.

중앙선이 연결된 지금의 ‘경의중앙선’은 경기도 파주·고양부터 구리·남양주·양평까지 서울 북쪽과 경기지역 5개 시군을 동서로 가로지른다. 그 가운데로 홍대입구, 서울역, 공덕, 용산, 왕십리, 청량리 등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를 지난다. 하루평균 승하차량 46만8227명, 전국 도시철도 승하차량 12위. 계란 흰자에 사는 이 많은 사람들에겐 생명줄이다.

고양시에 사는 나 역시 경의선에 짜증을 내다가도 홍대나 서울역을 20분 만에 도착할 때면 새삼 감사하다. ‘운수 좋은 날’엔 20분 타겠다고 20분 기다릴 수도 있는 게 문제지만,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강변북로를 생각하면 선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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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경의-중앙선 통학러들의 한숨소리’ 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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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차간격과 고질적인 지연은 경의선 운행의 문제라기보다는 날 때부터의 한계다. 경의선은 KTX, ITX 등과 여러 ‘형님’들과 선로를 공유한다. 코레일 규정에 따라 일반 열차는 등급이 높은 고속·특급·급행열차에 선로 우선권을 양보해야 하는데 경의선은 일반열차라 KTX나 ITX를 먼저 보내줘야 한다.

특히 왕십리~청량리~상봉~망우 구간은 KTX와 ITX뿐 아니라 무궁화호와 누리호, 화물열차, 수인분당선, 경춘선까지 동시에 다니며 지연이 더 극심하단다. 승객들까지 몰리다 보니 한 역에서 1, 2분 지연이 쌓이고 쌓여 끄트머리에선 십수 분이 되는 것이다.

해답은 선로를 늘리는 것이지만 서울 중심가를 관통하는 위치상 쉽지는 않다. 역 지하화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가능한 구역에 선로 구조를 변경하거나 확장하고 열차 시간표를 조정하면서 애쓰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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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연남동 경의선 숲길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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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중앙선에 대한 희화와 비난이 범람하는 가운데 이런 내 마음을 고백해도 될까. 순진하게 속 터지는 소리라고 욕먹는 건 아닐까, 조금 소심해졌다.

고민하는 내게 가좌역 인근에 사는 친구가 슬그머니 이야기한다.

“그래도 은근히 황금 노선이야. 경의선 숲길 같은 데도 다 연결돼있고.”

맞아, 옥수나 한남같이 교통 까다로운 곳도 약속 장소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경의선 라인에 사는 한 회사 선배도 목소리를 보탠다.

“나도 경의선 좋아해! 주말 아침 9시에 타봤어? 자전거 끌고 양평 가는 사람들도 많아.”

다소 용기를 얻어 유튜브를 검색해봤다. “문산에서 군 생활했는데 그쪽 복무하는 군인들에겐 정말 고마운 역” “파주 9사단 근무했는데 경의중앙선 휴가 때마다 감사히 이용했습니다.”

안다. 이러다가도 5분이 급한 어느 아침이면 변명이고 나발이고 욕을 읊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경의선을 감싸냐고? 나도 명쾌하게 설명하진 못하겠다. 말을 고르다 툭 국민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1994)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4명의 기자가 돌아가며 씁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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