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6 (월)

과학적 근거의 의료계 통일안? 증원 유예하고 1년 ‘투자’하자 [왜냐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달 28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 옆으로 환자들이 보인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김상준 | 런던정경대 보건경제학박사(왼쪽사진)



정웅기 | 존스홉킨스대 보건정치학박사





정부는 지난 4월8일 보도자료를 통해 “의료계가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통일된 의견을 제시한다면 열린 자세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의료계가 공신력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에 대한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부가 의대증원 규모를 결정할 때 근거로 삼았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 사례가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다. 2020년 보고서를 발간하고 이듬해 의사인력 중장기 계획을 위해 전공별 규모를 다시 추계했는데, 실제 제출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이 대략 6개월이다. 정부 산하기관의 연구가 반년이 걸렸다면, 의료계가 새로운 연구팀을 꾸려 과목·지역별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연구를 수행하려면 1년도 길지 않다. 사안의 긴급성을 감안한 최소한의 기간이다.



의료계의 다원적 구조상, 만약 누군가가 나서 협상한다 하더라도 전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쉽지 않고 외려 ‘밀실협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이런 내부 상황을 잘 아는 정부가 당장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통일된 숫자를 가져오라 말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2025년 의대증원 배정을 유예하고 1년을 ‘투자’하는 것은, 한쪽의 일방적 후퇴가 아니라 상호 신뢰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합리적 정책 조정이다.



의료계는 정부와 시민들이 납득할 만한 정책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정부가 핵심 근거로 든 세 건의 보고서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공신력 있는 기관을 중심으로 임상의와 정책 연구자들을 함께 불러 모아 의료인력 계획에 관한 대안적 관점을 정부에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지난 보고서들이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강력한 수요 억제 정책과 그 효과, 디지털 헬스로 인한 의사 생산성 향상, 의학교육 및 수련, 전공별 정원 조정, 지역의료 거버넌스의 구축 방안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정부가 이런 방향에 동의한다면, 적어도 세 가지 즉각적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2025년 정원의 현행 유지, 전공의 보호 대책의 수립, 그리고 개혁 인프라의 마련이 그것이다.



첫째, 2025년 증원의 전면 재논의를 발표해 대학과 수험생의 혼란과 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대학들은 늦어도 5월까지는 정원을 확정해야 한다. ‘무늬만 지방의대’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되, 계약형 지역인재 전형 기준(3년 또는 6년)을 확립하는 작업을 동반해야 한다. 의료계 역시 1년의 투자를 약속받는 대신 연구 결과에 기초한 개혁안을 반드시 수용할 책무가 있다는 점을 의정 협의에 명시해야 한다.



둘째, 환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정부와 의료계가 함께 사과하는 동시에 실질적인 전공의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업무개시 명령, 의사 미국행 추천서 발급 거부 등 정부와 의료계 간 감정의 골을 필요 이상으로 깊게 만든 조치들을 중단하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민·형사 소송 리스크를 완화하는 시스템을 안착시키는 일과 주 64시간 이상 수련 금지 및 24시간 연속 근무 금지를 명문화하는 과제는 그 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끝으로, 정부는 보건의료 개혁이 작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대통령실 안)든 ‘보건의료계 공론화 특별위원회’(민주당 안)든, 이른바 사회적 합의기구는 의대 정원을 몇 명 늘리는지 결정하는 자리여서는 안 된다. 의대 정원 결정은 의료계가 1년 동안 생산하게 될 근거에 기초할 일이다. 오히려 사회적 합의기구는 필수의료 정상화와 지역 완결형 의료체계 구축 등 정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정책 목표를 진전시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러 방법이 가능하다. 한 가지 길은 보건의료기본법에 명시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를 정례화, 내실화해 지난 두 달 동안 쏟아낸 정책들을 사안별로 충분히 논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 또 다른 길은 지속적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간 사문화 형태로 머문 ‘보건의료발전계획’의 초안을 만들고, 이를 공론화해 향후 개혁 방향의 기본 틀을 수립하는 것이다. 국회가 보건의료 개혁을 위한 국가위원회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 위원회가 각 이해당사자를 대표하는 민간 연구자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활동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해 향후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다. 어떤 선택지를 취하든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