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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월드리포트] 미국 정치도 끝이다? 미국이 아직 미국일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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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원의장은 권력서열 3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부통령이 상징적으로 겸직하는 상원의장과 달리 하원의장은 사실상 하원을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상임위원장 배분과 주요 사안에 대한 조사권, 청문회 개최 등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하원의 고유 권한인 세입과 대통령을 포함한 공무원의 탄핵소추 등도 하원의장의 의지에 따라 실행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할 일 하겠다"…강경파 8명에 퇴출된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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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지난해 10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하원의장에서 해임됐습니다. 여야 간 이견으로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공무원들 월급 줄 돈마저 바닥난 연방 정부가 일시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45일짜리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킨 게 빌미가 됐습니다. 대다수 공화당 의원들이 매카시 해임에 반대표를 던졌지만 대규모 예산 삭감을 주장하던 공화당 내 강경파들 단 8명의 찬성표로 해임안은 가결됐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건 여당인 민주당의 태도였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연방정부 일시 폐쇄를 막은 만큼 도와줄 법도 한 데, 민주당은 매카시 해임안에 전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우리 정서에서는 언뜻 야박해 보이지만, 미 의회의 정치 문화로 보면 이상할 게 없다는 설명입니다. 협치 문화를 갖고 있는 상원과 달리, 하원은 철저히 다수당의 뜻에 따라 운영됩니다. 정말 초당적 사안이 아니라면 다수당이 주도하는 표결에 소수당이 찬성표를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매카시 의장도 표결 전 민주당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매카시 의장은 취임 때부터 소수에 불과한 공화당 강경파에 휘둘리며 고전했습니다. 2022년중간 선거에서 불과 9석 차이로 하원 다수당이 된 터라 당내 이탈자가 몇 명만 나와도 과반 득표가 불가능했습니다. 의장직에 오를 때도 20명 남짓한 강경파와의 줄다리기로 무려 15번이나 재투표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그런 만큼 이들과 충돌할 경우, 해임안 제출이 단순한 위협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매카시는 "할 일을 하겠다"며 의장직을 걸고 임시 예산 처리를 강행했습니다.

존슨 하원의장, '최약체'에서 '거물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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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

앞서 말씀드린 대로 라면, 매카시 의장이 마치 살신성인하는 정치인인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사실 매카시 의장은 그 특유의 능수능란함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건 모험을 한 걸까요? 이 참에 소수인 강경파를 누르고 가겠다는 승부수였을 수도 있고, 실제 해임안 표결에 가더라도 표 단속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그릇된 자신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됐건 연방 정부가 계속 굴러가도록 예산을 공급할 의무가 있는 하원의장으로서 일정 부분 사명감이 작용했던 것 또한 사실로 보입니다.

매카시에 이어 하원의장에 오른 사람은 마이크 존슨입니다. 친트럼프 성향의 4선 의원이었지만 존재감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의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역설적이게도 별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공화당 주류로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 스티브 스컬리스는 강경파 견제로, 하원 법사위원장으로 친트럼프 성향의 강경파였던 짐 조던은 주류 측 반대표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결국 주류 공화당과 친트럼프 강경파의 타협안으로 '당내 적이 없는' 마이크 존슨이 하원의장에 선출됐습니다.

존슨은 어부지리로 권력서열 3위에 올랐다는 평가 속에 역대 최약체 하원의장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의장 선출 후 그의 행보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트럼프식 고립주의를 지지하던 그였지만 의장으로 활동하며 바이든 대통령과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장,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 등과 만나며 생각의 폭을 넓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접한 기밀 자료들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은 이제 지역구 의원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다며 책임감을 나타냈습니다.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은 실제 성과로 자신의 정치적 성장을 증명했습니다. 당내 반대가 여전했지만 매카시 해임의 원인이 됐던 예산안도 몇 차례 임시 예산 연장 끝에 본 예산까지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연방 정부가 문을 닫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상원에서 합의하고도 트럼프 반대로 무산됐던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타이완 등에 대한 안보 지원 예산도 끝내 관철시켰습니다. 무려 130조 원 규모에 달하는 합의안 처리를 위해 존슨은 다양한 분야에서 융통성을 발휘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반대로 통과가 어려운 국경 안보 법안은 전체 안보 패키지에서 아예 제외시켰고 지원안도 대상별로 4개의 별도 법안으로 쪼개 처리했습니다. 당내 요구가 큰 이스라엘 지원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우선시 하는 우크라이나 지원도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나눠 올린 겁니다. 우크라이나 지원안은 상정 자체만으로도 당내 반발이 거셌지만 존슨 의장은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뿐'이라며 밀어붙였습니다.

'해임 위기'…트럼프 한마디에 급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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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전 대통령

통과 당일, 마조리 테일러 그린 같은 공화당 내 강경파 의원들이 즉각 들고 일어났습니다. 굳이 강경파가 아니더라도 우크라이나 지원안의 경우 투표에 참가한 공화당 의원의 절반이 넘는 112명이 반대표를 던질 정도여서 정치적 위기는 피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해임안이 제출되면서 제2의 매카시가 될 수 있단 전망까지 나왔지만 트럼프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급반전됐습니다. 트럼프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이다", "나는 그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강경파를 대표하는 프리덤 코커스 대표도 "지금은 그렇게(의장 해임)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해 해임론에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구사일생은 요행이 아니었습니다. 존슨의 정치적 수완이 법안 통과에만 그치지 않았던 겁니다. 존슨 의장은 법안 표결 전 트럼프 전 대통령을 찾아 마러라고 리조트를 방문했습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전 정지작업을 했던 걸로 보입니다. 또 우크라이나 지원안에서 경제 분야 지원은 보조금이 아닌 취소 가능한 차관 형식으로 바꿨는데 이런 아이디어를 마치 트럼프에게서 받은 것처럼 공을 돌렸습니다.

해임안이 완전히 철회된 건 아니지만 통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트럼프가 재신임 의사를 밝힌 데다 공화당 내에서도 의장 부재로 인한 혼란을 피하고 싶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또 이전 매카시 의장 때와 달리 민주당에서도 해임안 투표 시 반대표를 던지겠다는 의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대선을 앞두고 경쟁관계인 공화당이 수뇌부 부재로 자중지란을 겪는 게 민주당 입장에서 나쁠 리 없는 데도, 공화당 소속인 존슨 의장을 위해 투표하겠다는 건 협치 관행을 찾아보기 어려운 하원에서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미국이 아직 미국일 수 있는 이유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미국 정치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많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자유 진영을 이끄는 맹주로, 소련 붕괴 후에는 전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군림했지만, 중국의 급부상과 다극화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위상은 찾기 어려워진 게 사실입니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외교 안보와 경제 모든 면에서 동맹을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평가는 더욱 커졌습니다. 여기에 미국 내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적 성격,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개인적 기행까지 더해지면서 미국도 이제 끝이 아니냐는 식의 냉소적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집권 후 동맹 중심으로 회귀하긴 했지만 미국 우선주의적 경향은 트럼프 때나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또 올 연말 대선이 바이든 대 트럼프 재대결 구도가 확정되면서 미국에 이렇게 인물이 없느냐는 회의론도 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미국의 형편이 넉넉지 않게 되면서 미국의 행태도 전 같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매카시나 존슨 의장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면면들이 '아직 미국을 미국일 수 있게 하는 저력'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매카시나 존슨을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중임을 맡았을 때 그에 맞는 소명의식을 발휘하는 게 어디에서나 혹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미국만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니 말입니다. (굳이 누군가를 염두에 둔 말은 아닙니다.) 존슨 등의 사례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아직 미국 지도층이 그런 역량을 잃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나라였다면 굳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면서까지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AP, 연합뉴스)

남승모 기자 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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