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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문화와 삶]연애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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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봄이 오기 전에 얇은 옷들을 꺼내고 여름이 오기 전에 옥수수와 복숭아를 주문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보일러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나는 계절을 준비하는 하나의 의식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어른스럽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어른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스스로의 미숙함을 알면서 생겨난다. 나는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니다 땀이 뻘뻘 흐를 때가 되어서야 여름옷을 꺼내고, 허겁지겁 선풍기를 켰다가 겨우내 쌓인 먼지 바람을 얼굴에 덮어쓴다. 툴툴대며 얼굴을 씻거나 선풍기의 시커먼 먼지를 닦으면서 헛구역질을 할 때 나는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넌 환절기마다 짜증을 내.” 나와 세 번의 사계절을 보내고 헤어진 연인은 계절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고 했다. 날씨와 풍경이 바뀌는 것에 둔감한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과 기분도 잘 알아채지 못한다. 기차가 10분 정도 연착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 어느 여름 날, 그는 내가 입고 있던 긴 소매 셔츠를 벗기며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기온이 28도야. 잘 봐. 너만 긴팔을 입고 있어.”

생각해보면 그는 나를 항상 기다려주었던 것 같다. 장마철에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걷거나, 한겨울에 외투를 입지 않고 돌아다녀도 그는 말없이 자신의 우산을 내주거나, ‘좀 춥지 않나?’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매일 안부를 살뜰하게 묻고, 기념일을 챙기고, 철마다 여행을 가는 그런 흔한 연인들의 의식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굴어도 나를 받아주는 사람.’ 나는 그의 아량에 맘껏 기대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 알았다”고 우쭐했다.

합격만 하면, 졸업만 하면, 취업만 하면, 승진만 하면. 나는 나의 평온을 끝없이 기약했고 생각하던 미래가 엇나갈 때마다 현재를 미워했다. 그래서 나의 지금을 지켜주던 연인이 싫었고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이 관계가 끝나기를 바랐다. 내 자신도, 나의 주변도 살피지 못하는 나는 그에게 어떤 약속도, 자랑도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가 먼저 이별을 말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면 나를 더 견뎌줘야지. 내가 어떤 상태로 있든 나를 사랑해줘야지. 헤어지는 순간에 나는 내 가슴속에서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을 모두 그에게 퍼부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좀 더 챙기는 사람이 되길 바라.”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커다란 공포가 밀려왔다. 내가 하던 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연애남매>(JTBC)를 보다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출연자인 ‘주연’은 마음 가는 상대인 ‘재형’이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오빠인 ‘용우’에게 비밀 대화를 요청한다. 상심이 얼마나 클까? 동생과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오빠 용우가 주연이를 대신해 화를 내주겠지? 그런데 용우는 실망한 동생에게 냉정하게 굴며 그런 자신의 태도에 해설을 덧붙인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연애는 떼쓴다고 얻을 수 있는 쿠키 같은 것이 아니야. 사랑은 그것을 알고 최선의 모습으로 노력하며 바뀌는 과정이야.”

사랑이란 매력 자본의 단순 교환이나 누가 더 상대를 위하는지 매기는 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자 두 세계의 교환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용우가 동생 주연에게 전한 이 커다란 진실을 과거의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그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를 기다리며 내게 그 노력이 전해지기를 바랐던 성숙했던 나의 연인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성숙은 그런 후회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일면일 뿐이야.”

경향신문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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