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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은행에 민간화폐 발행 맡겼지만…주담대엔 엄격해야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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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국은행 금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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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와 금융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상업은행이 만든 민간화폐(예금)가 통화량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민간화폐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래에서 지급수단으로 사용된다. 반면 중앙은행이 만드는 공공화폐인 준비금(중앙은행 예치금)은 상업은행과 중앙은행간의 거래에서만 사용된다. 이처럼 민간화폐가 일반 경제주체들의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공공화폐가 은행간의 결제자산으로 역할 하는 체제를 이중통화제도라고 부른다는 것은 수차례 강조해온 바와 같다.



현대의 통화제도에서 민간화폐와 공공화폐가 공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민간화폐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의 부채라는 점에서 상환 가능성이 불확실한 예금이 액면가를 유지하면서 화폐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공적 제도의 개입과 지원이 필요하다. 금융안전망이라고 불리는 제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중앙은행의 공공화폐가 은행 간의 거래를 정산하는 최종 결제자산으로 사용되는 제도, 즉 지급결제제도가 대표적이다. 잘 알려진 중앙은행의 최종대부 기능도 지급결제제도에서 파생된 것이다. 일시적으로 결제자산이 부족한 상업은행들에 준비금을 빌려주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금융안전망으로는 예금보험이 있다. 예금보험은 민간은행의 부채인 예금에 대해 지급보증을 제공함으로써 예금자들의 패닉과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예금이 안정적으로 화폐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컨대 상업은행들의 예금이 민간화폐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중앙은행과 예금보험이라는 다층적인 안전망 덕분이다. 화폐발행 기관인 상업은행들에 주어지는 이러한 금융안전망은 비금융 분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이한 제도다. 비금융 분야의 사기업들이 시장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질 경우에 대비해 공공기관이 자금을 빌려주는 제도(최종대부)는 없으며, 또한 사기업의 단기부채에 대한 지급보증을 공공기관이 상시로 제공하는 제도(예금보험)도 비금융 분야에서는 찾기 어렵다.





민간의 화폐 발행 기능은 일종의 특혜?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종종 제기된다. 공공부문의 개입과 지원을 통해서만 민간화폐가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다면, 그처럼 중차대한 화폐 발행이라는 기능을 ‘왜 굳이 민간은행이 담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경험한 수많은 금융위기와 자산버블 등의 사례는 이러한 질문에 설득력을 더한다. 민간은행들의 무책임한 화폐 발행이 때로는 큰 사회적 비용을 야기한다면, 평소 공적 기구가 개입하고 지원까지 해주면서 굳이 민간은행에게 화폐 발행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길 이유가 무엇인가? 유틸리티 분야나 네트워크 효과가 큰 산업의 경우와 유사하게, 화폐 발행이라는 공적 기능도 공공부문이 직접 담당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은행들의 사적 이윤 동기가 아닌 공공부문의 공적 목표와 책임의식에 기반한 화폐 발행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기실 이런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금융위기를 겪을 때마다, 근본적인 금융개혁의 필요성과 더불어 단골로 등장해왔다. 20세기 초 대공황 직후의 내로 뱅킹 주장, 최근의 주권화폐론 등은 모두 유사한 문제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민간은행이 화폐 발행을 담당하는 체제에는 고유한 장점이 있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의 모건 릭스 교수에 따르면, 현대의 통화제도는 화폐 발행이라는 공적 기능을 민간기업에 아웃소싱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웃소싱 이유는 민간은행들이 다름 아닌 투자 전문가들이라는 점에 있다. 모든 경제문제가 그러하듯, 화폐 역시 얼마나 생산해서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민간은행의 화폐 발행은 대출을 통해서 이뤄진다. 대출자금의 수요자에 대한 심사 등을 거쳐 대출이 결정되면, 은행은 대출자의 계좌에 예금을 기록해주는 방식으로 민간화폐를 만들어낸다. 은행 대출이란, 은행이 보증하는 채무증서를 지급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대출자에게 건네주는 것이며, 그 채무증서가 바로 예금, 즉 민간화폐다.



민간은행이 화폐를 발행하는 체제는, 화폐의 생산과 분배를 민간은행이 결정하는 체제다. 투자 전문가로서의 민간은행은 자금수요자들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상환 가능성 등을 판단하여 투자(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대출자가 대출자금을 활용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한다면, 그 대출의 상환 가능성은 매우 높을 것이므로 은행의 여신심사는 결국 화폐 수요의 사회적 적정성에 대한 판단이 된다. 개별 은행의 이윤 동기에 지배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은행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화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을 공공기관이 직접 하지 않고 민간은행들에 위탁하는 이유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하지 않고 시장경제를 하는 이유와 같다.



물론 시장경제가 그러하듯, 민간은행의 화폐 공급이 언제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공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불필요한 곳에 너무 많이 공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가 시장경제의 무질서함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보다 더 좋은 현실적 방법은 없다. 다만 민간화폐의 태생적 불안정성을 억제하기 위한 공적 장치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중앙은행과 예금보험 등의 금융안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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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 금고에 보관중인 현금.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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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무엇을 규제하고 무엇을 놔둬야 하나





이렇듯 현대 화폐제도는 민간의 주도적 역할과 공공의 지원이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민-관 협력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은행 규제와 파산에 대한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화폐 발행을 민간이 담당하는 체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민간의 전문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 자율성은 다름 아닌 투자 전문가인 은행의 대출심사에서의 자율성이다. 물론 금융안전망의 혜택을 입는 만큼 규제와 감독은 필요하지만, 은행의 자율적 투자의사 결정을 침해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둘째, 금융안전망을 통해 민간은행의 화폐발행 권한을 보호하는 것은 투자전문가로서 은행의 역할 때문인데, 사실상 별다른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대출이 있다. 주택담보대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더욱이 담보인정비율(LTV)에만 의존할 경우, 대출을 통한 화폐 증발과 자산가격 상승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버블 위험이 상존한다. 따라서 이런 유형의 대출을 통한 화폐 발행에는 더한층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



셋째, 여신 심사에서 은행의 전문성 발휘를 보장하되, 수신에서의 과도한 경쟁은 억제할 필요가 있다. 예금보험이라는 안전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예금에 이자가 지급되는 경우, 은행 예금은 사실상 무위험 수익을 보장하는 자산이 된다. 고금리를 통한 수신 경쟁이 은행의 모험적인 자산 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 수신금리 경쟁은 통제되어야 한다. 과거 미국이 예금보험제도와 수신금리 규제를 동시에 도입했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은행의 수신 경쟁은 금리 경쟁이 아니라 지급수단으로서의 편의성 제고를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화폐 발행기관의 파산을 처리하기 위한 별도의 제도가 필요하다. 화폐가 시장경제에서 민간기업에 의해 발행되면, 화폐를 잘못 발행한 은행은 파산할 수 있다. “파산 없는 자본주의는 지옥이 없는 기독교와 같다”는 말처럼,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파산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에 해당한다. 그러나 일반 기업의 파산과 화폐발행 기관의 파산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파산기업의 잔여재산 가치를 극대화하면서 채권자들 간의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파산기업의 채무 동결이 필요하다. 그러나 화폐발행 기업의 채무는 화폐 그 자체다. 이들의 채무 동결은 민간화폐의 기능 중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화폐발행 기업의 파산 절차는 특정 채무의 원활한 상환(예금인출, 이체, 송금 등)을 보장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신속한 예금보험금의 지급, 수탁관리인의 권한 행사 등을 아우르는 은행 정리제도의 작동은 민간화폐의 원활한 기능을 보장하기 위한 금융안전망의 일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정상화 및 정리계획 작성, 베일인 제도 등은 은행의 주주와 채권자에게 파산 책임을 묻되 동시에 파산은행이 만든 화폐의 기능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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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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