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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50년 간첩 누명’ 아빠 위해 법정에 선 딸…법원은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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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최창일씨의 딸 최지자씨가 무죄 선고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장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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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50여년 전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 한국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간첩으로 기소되어 형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인권 침해가 있었습니다.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사법부는 그 임무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대한민국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선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무죄.”



23일 오후 고 최창일씨 재심 사건 선고기일이 열린 서울고등법원 312호. 재판부의 선고가 끝나자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평생 간첩 누명을 쓰고 살아온 재일동포 고 최창일씨가 50년만에 혐의를 벗게 된 순간이다. 검찰은 최씨가 50여년 전 법정에서 했던 진술을 증거로 징역 7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고 최씨가 당한 국가 폭력을 사과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재판장 백강진)는 이날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는 최씨의 재심에서 49년 전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최씨는 1941년 일본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나 도쿄대를 졸업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다. 하지만 국가는 최씨가 간첩 활동을 하려 한국에 입국했다며 최씨를 불법 구금하고 간첩 활동 진술을 받아냈다. 1974년 법원은 최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고, 최씨는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6년간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최씨는 1990년대 후반 질병으로 숨졌다.



이날 법정엔 재심을 신청한 최씨의 딸 나카가와 도모코(한국이름 최지자)씨가 섰다. 2017년에야 우연하게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뒤 딸 최지자씨는 2020년 1월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해 11월에야 재심 청구가 인용됐지만, 검찰은 끝까지 최씨의 ‘유죄’를 주장했다. 최씨가 수사기관에 불법적으로 갇혀서 했던 자백은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도, 법정에 나와 했던 자백은 증거로 인정해야 한다며 징역 7년을 구형한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법정에서의 진술 또한 수사기관에서 불법구금으로 임의성 없이 이뤄진 진술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그런 사정이 해소되었다는 점에 대한 검사의 증명이 없다고 판단된다”며 “피고인의 모든 공소 사실에 대해서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특히 재판부는 무죄 선고 주문을 읽기 전 “이 사건은 남북 분단이 빚어낸 이념 대립 속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이자 성실한 대한민국의 국민, 그리고 가장이었던 최창일씨가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라며 “오늘의 판결이 망 최창일 선생과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치유의 의미를 갖기를 바란다”고 최지자씨와 가족들에게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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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최창일씨(왼쪽)가 딸과 함께 찍은 사진. 최지자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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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자씨의 바람처럼 아버지는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가족들이 받은 상처까지 치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지자씨의 엄마와 오빠는 “한국 정부로부터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며 지자씨의 재심 신청에 반대해왔다. 최지자씨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서울대 강사가 된지 얼마 안된 때 체포당했다. 그대로 일했다면 훌륭한 연구자가 돼 한국에서 활약했을 텐데 구금된 것이 그의 꿈을 무너트렸다”며 “평생 아버지가 친구를 만나는 것도 본 적 없고, 엄마와 오빠는 일본으로 이사하고도 '빨갱이의 가족'이라 불리며 차별을 당했다”고 말했다.



최지자씨에게도 한국은 여전히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정치에 이용한 무섭고 끔찍한 나라”이다. 일본에서 일하는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인 최지자씨가 한국 정부에 재심을 청구하고 기다리는 4년간 최지자씨는 수차례 포기를 고민했다고 한다. 최씨처럼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혐의를 벗지 못한 이들도 많다. 최씨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강요에 의한 수사기관 진술뿐 아니라 이로 인해 영향을 받았을 법정 진술의 증거능력도 부인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라며 “국가 폭력 피해를 입은 다른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을 비롯한 인권 침해 사건들도 조속히 해결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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