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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법원, ‘정부 정책 통제’ 어디까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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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논란’으로 본 실태와 쟁점

경향신문

지난 5월 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이 있는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앞을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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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법원은 정부 정책에 대해 어디까지 판단할 수 있을까. 지난 5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구회근·배상원·최다은)가 내놓은 의대 정원 증원 관련 결정이 법조계에서 큰 논쟁거리다. 1심 법원이 일관되게 원고들에게 소송을 낼 자격(원고·신청인 적격)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의대생에게 원고적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는 단순치 않다. 행정소송은 법원이 위법한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거는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법원이 사실상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지적과도 떨어질 수 없다.

‘새만금 판결’로 원고적격 기준 정해

의대생, 의대 교수, 전공의, 수험생이 정부의 의대 증원을 중단해 달라며 법원에 낸 여러 건의 집행정지 신청사건 핵심 쟁점은 ‘원고적격을 인정할 것인지’였다. 의대생, 의대 교수, 전공의, 수험생은 의대 증원의 직접적인 대상자(대학 총장)가 아니라 ‘제3자’다. 원고적격을 인정하지 않으면 법원이 증원의 적법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소송을 끝낸다. 원고적격을 인정하면 증원의 적법성을 구체적으로 따지는 단계로 넘어간다. 법원의 판단 범위도 넓어지는 셈이다.

행정소송법은 “처분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새만금 판결’은 원고적격 기준을 정한 대표 판례다. 환경단체가 정부의 새만금 사업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청구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환경단체의 원고적격을 부인했다. 대법원은 관련 법령이 정부 처분에 관해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이 있다고 규정하면 제3자도 행정소송 원고가 될 수 있지만, 국민 일반이 가지는 일반적·간접적·추상적 이익만 있다면 원고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환경단체 쪽은 헌법이 ‘환경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한다며 원고적격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새만금 갯벌과 생명에 대한 사형선고”라며 대법원을 비판했다. 이후 학계에서는 원고적격을 확대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졌다. 박재윤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행정소송은 일반 공중의 관점에서 처분이 적법한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제도”라며 “누구든지 대표할 만한 사람이 따질 수 있게 해주면 그 이익은 처분과 직접 관련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 공중에 미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원고적격 확대 논의가 이뤄졌다”고 했다. 정부 정책의 영향을 받는 시민이 행정소송을 낼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하고, 행정소송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정책의 적법성을 다툴 수 있다는 점에서 원고적격 확대의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새만금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원고적격을 보다 넓게 인정한 사례도 종종 나왔다.

이런 맥락은 이번 의대 증원 건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우선 “제3자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증원에 관해 그 누구도 다툴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고 했다. 대학이 원하는 증원을 처분의 대상자인 대학 총장들이 다툴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제3자로 원고적격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의대생을 원고로 인정하는 근거를 헌법에서 끌어왔다. 헌법 제31조의 ‘교육받을 권리’다. 재판부는 학습권은 단순히 추상적·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법적 효력을 가지는 권리라고 했다. 재판부는 “전국의 거의 모든 의대가 즉시 2000명을 증원하면 사실상 의학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호소하고 있다”며 “현재 약 3000명에서 2025학년도에는 (2024학년도 의대 신입생들이 모두 유급하면) 한 학년에 8000명이 함께 교육받게 되면서 의대 교육이 파행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적어도 의대생에게는 교육환경이 기존보다 열악해지거나 교육시설 참여기회가 봉쇄된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행정소송으로 증원의 적법성을 다툴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1심 법원들이 내리 각하 결정을 한 것은 전통적인 새만금 판례 법리를 따른 것이었다. 특히 서울고법 결정 이후인 지난 5월 21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재판장 김정중)는 또다시 각하 결정을 하면서 서울고법 결정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재판부는 “의대생에게 어떠한 개별적·직접적·구체적 이익이 있다고 볼 만한 사정을 찾아볼 수 없다”, “증원으로 인해 재학생들의 교육 참여기회가 형해화된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등 격한 어조로 원고적격을 부인하는 이유를 결정문에 썼다. 이 재판부는 증원으로 인해 열악해지는 교육환경은 대학이 해결할 일이지, 증원 자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조만간 최종 판단을 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소송과 같은 공익소송에서 원고적격 확대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것과 이번 의대 증원 건은 결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지역주민이 환경피해에 직접 소송을 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대신 소송을 내는 환경단체는 공익성이 있지만, 의료인은 증원과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또 대학생에게 원고적격을 인정하면 교수 임용, 폐과 등 각종 대학 관련 조치에 대해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행정소송을 낼 수 있다는 말이냐며 서울고법 결정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정치의 사법화 속 법원의 입장 주목

서울고법 결정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결과적으로 법원이 의대 증원이라는 정부 정책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된 점에도 있다. 집행정지는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을 때’는 허용되지 않는다. 서울고법 재판부는 이 요건을 검토하면서 “필수의료·지역의료의 회복·개선을 위한 기초 내지 전제로서 의대 정원을 증원할 필요성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결정 후 한덕수 국무총리가 “현명한 판단”이라고 밝힌 것은 법원 판단이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로 활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의 실종에 따라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을 법원에 가져가 판단받는 소위 ‘정치의 사법화’ 현상 속에서 행정소송의 확대는 법원이 정국을 주도하고 결정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입법부·행정부와 달리 선출된 권력으로 구성되지 않고, 판단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는다.

김중권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에서는 모든 종류의 재판에 참심제를 도입해 사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추가로 보강하고 대국민 신뢰를 강화해 사법부가 사회의 살아 있는 일부가 되고 있다”며 “가령 1심 행정재판의 경우 직업법관 1명에 명예법관 2명이 함께 사건을 판단한다”고 했다. 차동욱 동의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이 해결이 안 되고 자꾸 소송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본다”며 “진영논리가 강화되면서 정치의 사법화가 계속될 텐데 그 과정에서 법원도 사법의 정치화가 될 것인지, 고유의 중심을 잡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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