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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취재파일] 지금의 권력이 '말'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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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장관-대통령 통화, 이제는 '제대로' 말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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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 권력의 중심인 미 연준 의장의 연설이 진행될 때, 금융시장의 숫자들은 연설문에 사용된 형용사와 부사 하나하나에 따라 실시간으로 요동친다. '말' 속의 수식어 하나가 미세한 온도차를 만들고, 수조 달러의 돈이 실시간으로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권력자의 말'이 갖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즉각적이고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시장 최고 권력의 '말'은 크고 작은 사고가 터졌을 때 더욱 영향력을 발휘한다. 위기 상황에서 연준 의장을 비롯한 세계의 중앙은행장들은 실효적 조치와 함께 '말'로써도 상황을 관리하곤 하는데, 그 '말'들은 지나치게 세세해서도 안 되지만, 또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져서도 안 된다. 권력이 사용하는 '말'의 미세한 요소들에 따라 시장 구성원들은 안도하기도, 공포에 질려 날뛰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세계 경제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말'에 쓰일 작은 수식어 하나의 용례까지 신중히 따지는 이유다.

"통화 없다"던 권력자들의 '말', 배치되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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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사고가 터졌을 때, 지금 우리의 정치권력자들이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어떨까? 지난해 7월 채 해병이 향년 20세의 나이로 사망한 당시, 전 국민이 느꼈던 비통함이 정권을 뒤흔들 분노의 감정으로 비화될 거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상부의 '경찰 이첩 보류 명령'에 불복해 폭로에 나서며 국면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나비 효과가 되어 정부·여당의 궤멸적 총선 패배로 돌아올 거라 예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에 대처하는 권력자들의 '말'에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국회 운영위 중

윤준병/민주당 의원 : 국방비서관, 7월 31일 김계환 해병대사령관하고 통화한 사실이 있나요?

임기훈/당시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 : 없습니다.

윤준병/민주당 의원 : 사실이 아니면 그 부분을 어떻게 부정을 하실 거예요? 지금 (박정훈 대령) 진술서나 언론이나 이쪽에서 계속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국방비서관과)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

임기훈/당시 국가안보실 국방비서관 : 7월 31일 당일 제가 해병대 사령관하고 통화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군 검찰 조사 결과와 군사재판 기록에 따르면, 용산 대통령실은 채 해병 사건 조사가 진행되던 지난해 7월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상황을 파악하고자 여러 경로로 움직였다. 당시 움직였던 국가안보실의 인사들은 이것이 '군 관련 국가적 관심 사안이 벌어졌을 때 권력이 작동하는 정당한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들 중 일부가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국회 상임위에서 사실과 전혀 다른 답변들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 국회 운영위에 출석한 임기훈 국방비서관의 말이 대표적이다. 그는 '채 해병 사건 이첩 보류 결정이 내려진 지난해 7월 31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통화한 적 있느냐'는 국회의원들 질문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군 검찰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통화기록은 정 반대였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통화의 내용과 맥락이 무엇이었는지 전달할 길이 열렸겠으나, '통화 안 했다'는 답변이 거짓임이 드러난 이상, 무슨 말을 해도 국민들은 믿기가 어렵게 됐다.
-지난해 9월 국회 예결특위 중

위성곤 /민주당 의원 : 다시 묻겠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전화 받으셨습니까? 통화하셨습니까?

이종섭/ 당시 국방부장관 : 이 건과 관련해서 통화한 게 없습니다.


이종섭 국방장관 경우도 마찬가지다. SBS 취재 결과, 이종섭 장관과 윤석열 대통령은 채 해병 사건 조사 결과의 개요를 놓고 통화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로서 정확한 시각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채 해병 사건 조사 결과 개요가 용산 대통령실에 보고된 7월 31일 내지 그 직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 전 장관은 국회에 나와 여러 차례 '이 사안과 관련 대통령과 통화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대통령실은 사건 발생 1년이 다 되도록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전 장관 측은 현재는 '통화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대통령 격노는 없었고, 수사 결과에서 누구를 빼라 마라 한 적도 없었다'는 입장이지만, 불행히도 통화 사실에 대한 해명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상황이다.

▶ [단독] 대통령-국방장관 통화…"초급간부 처벌 가혹" (5/24일자 8뉴스 보도)

직권남용' 혐의 주변, 뜨겁게 소비되는 사실의 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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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환 사령관-박정훈 전 수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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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탄핵 뒤, 법전 속에서 얌전히 잠자던 '직권남용죄'가 깨어났다. 이 죄명은 이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기적인 '심판 기계'처럼 작동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엔 주로 보수 정권 인사들을 옭아매며 괴물처럼 덩치를 불린 이 법리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 이번엔 문재인 정부 인사들을 덮쳤다.

'심판 기계'가 된 '직권남용'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일부 법률가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법적 쟁점이 안 될 것 같은 사실들이 대중들의 도덕 감정에 불을 지르곤 한다는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과 사법농단 사건에서, 서해 피격 사건과 월성 원전 사건에서, 모두 혐의 주변 사실의 편린들이 대중 정서 폭발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제 '직권남용죄'는 '채 해병 수사 외압 의혹' 사건에서도 기지개를 켜며 현 정부 고위층을 겨누고 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양태가 반복되고 있다.

이른바 'VIP 격노설'이 소비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VIP 격노설'의 골자는 지난해 7월 31일, 사건 이첩 보류 지시를 받은 박정훈 전 수사단장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을 만나 "국방부가 왜 그러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 사령관이 "대통령실 회의에서 수사 결과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VIP가 격노하면서 장관과 통화한 뒤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일종의 '전언의 전언'인 셈이다. 그런데 김 사령관을 비롯한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은 "항명을 한 박 전 단장이 거짓말을 한다"고 몰아붙였고, 'VIP 격노설'은 '설(說)'이라고 하기엔 체급이 너무 커져버렸다. 채 해병 사망 사건의 조사와 이첩 과정을 폭로한 군인을 '거짓말쟁이'로 몰면서 대중들의 진실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9개월여 뒤, 이른바 'VIP 격노설'을 들었다는 또 다른 사람은 물론, 관련 녹취파일까지 등장하게 됐다. 그렇게 대중의 감정선에는 '반전'을 연료 삼은 분노의 불길이 다시금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토록 체급이 커져버린 'VIP 격노설'의 진원지, 대통령과 주변인들은 아직도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일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관련된 질문을 받고, "돌아가신 분의 시신을 수습하는 그런 일인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을 해서 이런 인명사고가 나게 하느냐"라며 장관을 질책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대중들의 머릿속에 흩뿌려져 있는 사실의 편린들을 정돈하기엔 정보 값이 턱없이 부족한 답변이었다. 대통령 주재 회의에 참석했고, 김계환 사령관과의 통신 기록이 남아 있어 'VIP 격노설'을 전달할 가능성이 있는 임기훈 전 국방비서관 등 고위공직자들도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권력이 말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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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 의장이 '말'로서 금융시장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은 흔히 '긴 줄 흔들기'에 비유된다. 기다란 줄의 한쪽 끝을 움켜쥔 사람은 자신의 언어가 갖는 미묘한 에너지가 긴 줄의 반대편 끝에서 예상치 못한 요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만 한다. 줄을 움켜쥔 사람은 때로는 미세하게, 또 때로는 과감하게, 명확한 전략과 목표를 가지고 정교하게 입을 움직여야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국방의 한 축을 책임진 현직 해병대 사령관과 고위 장성들이 수시로 수사 기관에 드나들고, 국가와 국민을 지킬 방도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지킬 방도를 고민하는 상황이 몇 개월간 이어지고 있다. '채 해병 특검법' 발의와 거부권 행사가 이어지며,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가늠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시계열이 늘어날수록, '반전'을 먹고 자라버린 대중들의 감정 위에는 '호기심'이라는 땔감이 끝없이 올려지고 있다.

현재 권력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인물들은 음으로 양으로, '자신들은 그릇된 선동의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제 '억울하다는 말'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커져버린 사태가 끝나지 않고 있는 원인의 한 축에는, 권력의 긴 줄을 쥔 이들이 내뱉는 '말들의 미숙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것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사실과 다른 말들을 깊은 고민 없이 쏟아 내거나, 해야 할 말들을 지나치게 아끼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원종진 기자 bel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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