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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우리 형제뿐 아니라 모든 통일운동가들의 어머니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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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범민련 대경연합 명예의장, 한기명 선생님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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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기명 선생님의 장례식을 시민·사회장으로 치르고 있다. 조선남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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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백두산엔 함박꽃이 한창이지요.

눈 내리던 마석모란공원 아버지(고 이형락) 곁에 엄마(고 한기명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대경연합 명예의장)를 모시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곧 100일이다.

백수는 거뜬할 것 같던 엄마가 겨울 들어서며 시름시름 잔병치레하더니 입원하고 사흘, 갈 시간 되었다며 링거도 거부하고 식음을 전폐한 상태로 미안하다 하시고, 일주일을 더 계시다가 지난 2월18일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6.

엄마께 사랑한다는 말 자주 못 하고 보내드린 것이 죄송하고 아리다. 천년만년 사실 것 같던,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실 것 같던 엄마. 조금 더 사셨다면 내 마음이 덜 찢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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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경기 마석모란공원에서 고 한기명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대경연합 명예의장의 49재 및 추모비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조선남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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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차디찬 땅에 묻어두고서야 엄마를 돌아본다. 내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 좀 다른, 특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동네 아주머니들 따라서 나물 캐러 갔다가 강둑에 심어진 호박을 하나씩 가져왔는데 평소 큰소리 낸 적 거의 없던 엄마가 엄청 화를 내며 “주인 없는 농작물이 어디 있냐? 이건 도둑질이야! 당장 제자리에 갖다두고 와!”라고 하셨다. 아니 다른 사람들도 다 가져왔는데 나만 어떻게 다시 갖다두냐고 항변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남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너는,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엄마는 “혁명가의 자식은 혁명가의 가족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사실 13살 초등학생이 혁명이 뭔지, 혁명가의 자식이 뭔지 어떤 건지 어찌 알까? 그러나 뜻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말씀 하시는 결기에 주눅이 들었을까?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 40여분을 걸어 그 강둑에 가서 주인을 만나 호박을 돌려드렸다.

아마도 이후의 내 삶은 그때 엄마가 말씀하셨던 ‘혁명가의 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리라. 중학교 시절엔 엄마랑 새벽시장 경매 끝난 채소전에서 배추 시래기를 주워 김치를 담았다. 시래기를 주워오면서도 너무나도 당당한 엄마가 어린 내 눈엔 참 멋있었다.

1940년대 동덕여고 동맹휴학 주도
단독정부 수립반대·통일 투쟁 매진
1986년 넷째딸 수배로 민가협 시작
양심수후원회·범민련 등 왕성한 활동

2017년 남편 ‘해방전략당’ 재심 무죄
배상금으로 장학재단 ‘형명재단’ 설립
장례식서 활동가 수십명 오열·추모

남편은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10년 세월을 교도소에 있고, 시모와 다섯 딸을 키워야 하는 힘든 세상.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밝았고 당당했다. 가족들 앞에서 속상해하거나 서러워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서문시장 난전에서 여름에는 냉차나 식혜를 만들어 팔고, 겨울에는 단팥죽과 호떡을 굽고 어묵도 끓여서 팔았다. 장사 끝내고 저녁에 집에 오면 몸이 천근만근일 텐데 우리에게 엄마 어릴 적 불렀던 동요를 가르쳐주고, 실뜨기 놀이도 함께했다. 할머니는 철없다 하시면서도 남편 없다 징징대지 않고 의연하게 자식들을 건사하는 며느리를 참 예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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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구에서 남편인 고 이형락 선생과 함께 걷는 고인. 필자 제공


엄마의 젊은 시절을 듣게 된 건 꽤 나이가 들어서였다. 1980년대 말, 어느 하루 안마를 해드리는데 팔뼈가 조금 어긋난 것 같아 언제 이런 거냐 했더니, 조금 주저하다가 어느 자식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잣집 막내딸로 세상 철없이 귀하게 큰 줄만 알았던 엄마는 여고 시절, 일제식민지 조국의 아픔에 눈을 떴고, 또래 여성들의 일본군 강제위안부 징발과 우리말 교육 폐쇄, 농민·노동자수탈 등의 만행, 만주의 무장 독립투쟁 등의 소식을 들으며 분노를 넘어 항일 투쟁의식을 키워갔다고 한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인 폄하와 인종차별 그리고 친일파를 등용하며 민족세력을 공격하는 미군정의 만행은 엄마가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는 1944년 서울 동덕여고(4년제) 학생회장으로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여 1948년 2·7구국투쟁과 5·10단정단선반대투쟁 등에 동덕여고 대표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유치장에 수감되고 학교도 자퇴했다. 유치장에서 간수에게 맞아 팔뼈와 허리뼈가 부러졌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20대의 한기명은 ‘20세기는 연애도 없고 예술도 없다’며 단독정부 수립반대 운동과 통일을 위한 투쟁에 매진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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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서 발언하는 고인.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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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필자가 노동운동으로 수배를 당하자 엄마는 대구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자리를 찾아가신 듯 자연스럽게 양심수후원회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활동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38년 동안 어느 집회 자리에서도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단아 엄마’가 아닌 ‘한기명 의장님’으로, 1990년대 말 대구를 떠난 나를 ‘한기명 선생님의 딸’로 소개하는 자리가 더 자연스러워졌다.

엄마의 부고에 많은 젊은이들이, 활동가들이 진정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가족들이 놀라워했다. 엄마는, 내 어머니 한기명 선생은 생물학적으로는 우리 형제의 어머니이지만, 당신이 낳지 않았어도 당신을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더 많이 아파하는 셀 수없이 많은 운동가들의 어머니였다. 장례식에 수십명의 대학생 활동가들이 오열하며 조문하고, 눈물 없이 읽기 힘든 편지글들이 쌓이는 것을 보며, 손주들은 뼈아픈 반성을 했다. 외할머니 평소 하시는 말씀에 관심 없었던 자신들의 무심함에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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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29일 대구공익활동지원센터 ‘바람’에서 열린 형명재단 창립보고회에 참석한 고인(오른쪽 둘째)과 필자(왼쪽 둘째).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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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남조선 해방전략당 사건이 재심에서 무죄판결 나고, 그 배상받은 것으로 장학재단(형명재단)을 하자고 했을 때 또 얼마나 놀랐던가? 여유 있는 삶도 아닌데, 개인을 위해 쓴들 누가 뭐랄 수 있나? 자식들도 동의했지만, 엄마의 결단 없이는 절대 가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해 12월1일 2기 장학위원 상견례 자리에도 오셔서 감사 인사와 건배 제의도 하셨는데, 그것이 공식적인 마지막 자리가 되어버렸다.

가시는 날까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신 우리 모든 통일운동가들의 어머니, 한기명 선생님. 이제 훨훨 날아 묘향산도 가보고, 중국이 아닌 내 나라 땅을 통해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던 백두산도 가보셨겠지요. 지금은 함박꽃이 한창이겠군요. 아버지 손 꼭 잡고 꽃구경하세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딸로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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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변산반도에서 고인과 필자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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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딸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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