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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집에서 애 낳을 판” 지자체 10곳 중 3곳, 분만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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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만 담당 의료기관 10년새 34% 급감

전국 463곳뿐···의원급은 195곳에 그쳐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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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이고댄스가 저출산 대책이라고요? 기가 차다 못해 헛웃음이 나옵니다. 분만 인프라 붕괴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각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아니겠습니까. "

익명을 요구한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정부가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매년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하고 있지만 실효성을 거두기 힘들어 보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례없는 저출산으로 분만인프라 붕괴가 가속화하면서 분만을 책임질 산부인과 병원들이 한계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불가항력 분만사고 발생 시 보상 재원을 전액 국가가 부담하는 등 의료소송 부담을 낮추고 분만수가 현실화와 같은 특단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4일 대한분만병의원협회가 보건복지부의 자료를 인용해 분만을 받는 의료기관 수가 2023년 기준 전국 463곳에 그친다고 밝혔다. 2013년 706곳과 비교하면 10년새 34% 줄어든 것이다.

요양기관종별 분포를 살펴보면 분만을 받는 산부인과 의원은 2013년 409곳에서 2023년 195곳으로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산부인과가 없는 시·군·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전국 250곳 중 22곳은 산부인과 자체가 없다. 산부인과가 있어도 분만실을 갖추지 못한 시·군·구는 50곳이었다. 250개 시·군·구 중 72곳(28.8%)은 사실상 분만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실제 광주광역시를 대표하던 산부인과 중 한 곳이던 문화여성병원은 저출산 여파를 이기지 못해 작년 9월 폐업했다. 2018년 전국 분만 건수 1위에 올랐던 경기도 성남시 곽여성병원도 지난달 30일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대한분만병의원협회와 대한주산의학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산부인과초음파학회 등에 소속된 분만 의사들은 이날 '대한민국 분만인프라 붕괴에 대한 긴급 성명서'를 내고 "정부와 정치권이 대한민국 임산부와 신생아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일본의 사례에 비춰볼 때 안전한 분만인프라를 유지하려면 분만을 받는 의료기관이 최소 700곳 이상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협회가 일본산부인과의사회와 일본조산사회의 도움을 받아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2020년 12월 말 기준 일본에서 분만 가능한 기관은 병의원과 산후조리원(조산소)을 합쳐 3192곳으로 파악됐다. 비단 의료기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토대로 전문의 배출 현황을 살펴보면 20신규 산부인과 전문의는 2008년 177명에서 2023년 103명으로 급감했다. 산과 교수의 정년 퇴임에 따른 변화를 감안하면 당장의 분만은 물론 관련 교육을 받고 미래세대의 분만을 책임질 전문의 배출도 기약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이들은 분만인프라가 붕괴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포괄수과제를 꼽았다. 2002년 도입된 포괄수가제는 진찰·검사·수술·주사·투약 등 입원 기간 발생한 모든 비용에 대해 정해진 비용만 지불하도록 한 제도다. 진료의 종류나 양과 관계없이 미리 책정한 금액만 지불하면 된다. 의료계는 자연분만으로 출산이 불가능할 때 시행되는 제왕절개수술을 포괄수가제 적용의 직격탄을 맞은 대표 사례로 지목해 왔다. 고질적인 저수가로 허덕이던 분만 병원들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속도의 저출산을 겪으며 줄폐업했다는 것이다.

정부도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30일 간담회를 열고 포괄수가제 연구 용역 결과와 함께 개선안을 내놨는데,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정책"이라며 되려 의료계 반발을 샀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이날 성명을 통해 "포괄수가제 원가 산정이라는 연구 과정 속에서 정부가 얼마나 산부인과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고 살인적인 저수가 정책을 밀어 붙이고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됐다"며 "의료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책임을 방기한 채 일방적으로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희생만 강요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지난 4년간 물가상승률 12.8%와 인건비 상승률을 고려할 때 최소 10~15%의 제왕절개 포괄수가제 비용 인상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대한분만병의원협회와 대한주산의학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대한산부인과초음파학회는 이날 오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붕괴되어 버린 출산 인프라와 갈 곳 잃은 임산부를 위한 대책 마련을 촉구한다. 대학병원 산과 교수들과 협회 임원들이 참석해 불가항력적인 분만 사고에 대한 안전망 구축, 인력 양성 등을 정부에 요청할 방침이다.

협회 관계자는 "분만인프라 붕괴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현재 또는 미래의 임산부"라며 "그들을 돌볼 의료진이 없다는 것은 모든 국민과 가정에 비참한 재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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