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18 (화)

‘퀴퍼’, 프라이드, 자긍심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 1일 오후 서울 을지로입구역과 종각역 사이에서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려 레인보우라이더스들이 행진에 가장 앞에서 이끌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지난 6월1일, 제25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종각과 을지로 사이의 도심 도로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참가자들은 퀴어 퍼레이드를 줄여서 ‘퀴퍼’라고 부른다. 이젠 인터넷에서 ‘퀴퍼’로 검색해도 관련 정보가 뜰 정도로 널리 쓰인다. 흥미로운 건 외국에선 주로 ‘프라이드 퍼레이드’라고 하는데 한국만 ‘프라이드’란 단어 없이 ‘퀴어 퍼레이드’라고 명명한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일본도, 대만도 모두 프라이드 퍼레이드라고 하는데 왜 우리만 ‘프라이드’를 쓰지 않았을까? 여기엔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피식 웃어버릴 사연이 있다.



퍼레이드와 영화제, 토론회 등 종합문화행사로 제1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건 2000년도다. 이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 중 대다수는 ‘프라이드’란 단어를 들으면 자동차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기아에서 1987년부터 생산해 국민차로도 불리던 소형차가 바로 프라이드였다. 1998년에 창간한 동성애 전문지 ‘버디’에서도 해외의 ‘프라이드 퍼레이드’ 에 대한 기사를 쓸 땐 굳이 ‘자긍심 행진’으로 풀어써야 했다. 1970년에 뉴욕과 시카고에서 처음 퍼레이드를 열었던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가 성소수자를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존재로 다룬 것에 저항하며 ‘자랑스러워하라!’고 외친 맥락이 당시 한국에 동일하게 적용되긴 어려웠다. 홍석천과 하리수의 커밍아웃도 아직 없던 때였다. 정상성을 뒤집어 재전유하고, 차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퀴어’를 전면에 내세워 공적 공간으로 나가는 전략을 세웠다.



퀴퍼에서 프라이드가 중요해진 건 역사적 맥락이 있다. 2014년 6월7일, 신촌 연세로에서 열린 제15회 퀴어퍼레이드에 처음으로 보수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반동성애 집단이 나타나 행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그들은 행사장 곳곳에서 동성애자는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사탄’ 이라고 외쳤다. 성소수자를 같은 인간으로도, 이웃 시민으로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둘러싸였지만, 참가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버티어 결국 밤 10시에 행진을 해냈다.



1969년 스톤월 항쟁에서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면, 2014년 한국에선 신의 이름을 빌린 자들이 그 역할을 행했다. 10년째 괴롭힘과 방해가 이어지고 있다. 2016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프라이드 뱅글(팔찌)’을 공식 기념품으로 제작한 건 우연이 아니다. 자긍심은 죄책감과 자기비하에 삼켜지지 않을 방패다. 내가 나여도 괜찮다고, 네가 너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자기 긍정’은 365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에서 등장한 ‘블랙 프라이드’에서 1970년대 성소수자의 프라이드가 영감은 받았다. 1993년 캐나다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하는 매드 프라이드(Mad Pride)가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2019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긍정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혼자가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할 때 힘을 갖는다.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6월18일까지 퀴어영화제가 이어진다. 또 7월6일엔 대전에서, 13일엔 제주에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예정이다. 아직 날짜는 미정이지만 앞으로 대구, 인천, 춘천, 창원, 광주에서도 열릴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모든 곳에 퀴어들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고, 다시 말해 올해 ‘퀴퍼’에 참여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의미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만들 특별한 하루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오직 한겨레에서 볼 수 있는 보석같은 기사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