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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혼분식 강요하고 대통령 찬양하던 노래가 있었다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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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여년 동안 서울 황학동과 동묘, 동네 전파사 등에서 발품 팔아 수집한 건전가요 엘피들.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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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국수가락 맛좋은 빵에 고소한 잡곡밥/ 그 맛을 알면 해와 같은 밝은 마음 튼튼한 육체/ 우리도 넉넉히 살 수 있어요/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프랜차이즈 빵집과 분식 전문점이 넘쳐나는 요즘, “이게 뭔 흰소리냐”고 할 수 있다. 군가 풍의 이 노래가 전국에 울려 퍼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원수 작사, 김동진 작곡의 ‘즐거운 혼, 분식’이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검사했다. 잡곡을 섞지 않은 흰 쌀밥을 싸온 아이는 손을 들고 벌을 섰다. ‘이밥(쌀로만 지은 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는 게 염원이었던 이들은 쌀밥을 유난히 선호했다. 쌀 부족으로 고심하던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며 이 노래를 만들어 보급했다.







10여년간 겨우 8장





박정희 유신 정권(4공화국)과 전두환 정권(5공화국)은 건전가요라는 이름으로 정부 시책에 맞는 노래를 지정하고 국민에게 듣고 부르기를 강요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길옥윤·김희갑·전석환·박춘석 등 유명 작곡가뿐 아니라 박목월·이은상처럼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시인을 동원해 가사를 만들고, 박경희·장미화 등 인기 절정의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뒤 엘피(LP)로 제작했다. 충성을 강요하고, 주민을 동원하고, 반공 의식을 고취하고, 박정희를 찬양할 목적으로 문화공보부가 ‘건전가요 보급위원회’까지 만들어 내놓은 일종의 관급 음반으로 관공서와 학교에 주로 배포했다. 유신 정권이 종말을 향해 달음질치던 1970년대 후반 이런 엘피가 유난히 많이 나왔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 스피커가 있는 곳에선 아침저녁 이 엘피를 틀어댔다.



야만의 시대가 만든 건전가요 엘피는 이제 귀한 대접을 받는다. 레트로 열풍으로 엘피가 부활하고, 고단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도 건전가요 엘피를 찾는다. 나는 10여년 동안 ‘다함께 부르는 건전 국민가요집’, ‘건전 생활가요’ 등 모두 8장의 건전가요 엘피를 모았다. 서울 황학동과 동묘, 동네 전파사를 공들여 뒤진 것치곤 빈약하다. 권위주의 통치가 끝나고 임무를 다하자 대부분 폐기돼 시중에 나도는 물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1975년에 제작된 ‘다함께 부르는 건전 국민가요. 문공부 선정 11곡집’(신세계 레코드)엔 그 시절 시민을 일순간 얼음으로 만든 ‘국기에 대한 경례’ 연주 음악과 ‘애국가’를 에이(A)면 1·2번 트랙에 담고 ‘즐거운 혼, 분식’ ‘새마을의 노래’ 등 1960~70년대 대표 건전가요를 실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라며 주민을 깨우던 ‘새마을의 노래’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작곡했다. 국가가 시민에게 스트레칭을 강요한 ‘신세기 체조’와 ‘재건 체조’ 노래도 실려 있다. “국민체조~ 다리 운동부터 시작. 하나~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팔 운동~, 목 운동~”으로 이어지는 체조 지도자의 구령을 배경으로 관현악 반주에 합창단까지 동원한 이 노래는 나름 웅장함이 느껴진다.



‘재건 체조’ 노래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작사했다. 박 시인은 이 음반에 실린 ‘오늘의 흘린 땀으로’도 작사했는데 “힘차게 맥박치는 산업의 고동”으로 시작해 “뭉쳐서 붉은 이리 무찌르고 즐겁게 살자 일하자/ 오늘의 흘린 땀으로 꽃피는 칠십년대 보람차게 맞이하자”로 끝맺는다. 북한 김일성 정권 타도와 산업화를 최고 가치로 내건 유신 정권의 요구를 충실히 대변한 것이다. 길옥윤이 작곡하고 패티김이 노래한 ‘기쁨을 노래하자’는 “세계 속에 빛나는 새로운 한국/ 우리는 일했고 기적은 꽃이 피었다”며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그린다. 음반 재킷엔 초가집이 밀집한 농촌에서 밀짚모자를 쓴 주민들이 삽과 괭이로 도로를 넓히는 새마을운동 현장을 담았다. 같은 해 12월 나온 ‘다함께 부르는 건전 국민가요 2집’(신세계 레코드)엔 ‘잘살아 보세’(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 ‘조국 찬가’(양영문 작사, 김동진 작곡), ‘우리 강산’(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예비군의 노래’(전우 작사, 이희목 작곡), ‘향토 방위의 노래’(모기윤 작사, 박춘석 작곡) 등 그 시절 텔레비전과 라디오만 틀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려 퍼진 노래를 망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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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내용 담은 노래도





유신 정권 말기인 1978년 3월엔 문화공보부를 재킷 전면에 명시한 엘피가 등장했다. 음반명 자체가 ‘의식의 노래’(서라벌레코오드)다. 삼일절, 현충일, 6·25(한국전쟁), 제헌절, 광복절, 한글날 등에 부르던 노래를 집대성했다. 한학자이자 작가였던 정인보(삼일절 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글학자 최현배(한글 노래), 청록파 시인 조지훈(현충일 노래)과 박두진(6·25의 노래)이 노랫말을 썼고, 국립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이 음반엔 ‘대통령 찬가’(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도 실렸는데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가난과 시련의 멍에를 벗고/ 민주와 부강의 굳은 터전으로/ 이루려는 그 정성 축복하소서”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찬양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도 대통령 예우곡으로 사용했는데,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사용을 중단했다.



같은 시기에 제작한 ‘건전가요집’(서라벌레코오드)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것들과는 다른 노래가 모였다. 금과은이 노래한 ‘즐거운 주말’(김후란 작사, 김희갑 작곡)은 토요일의 여유로운 풍경을 그린다. ‘새벽길을 걸어요’(조운파 작사, 김희조 작곡)는 근면을 강조하지만 주민 동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새마을의 노래’와 달리 새벽 꽃밭과 골목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렸다. 이 음반엔 박경희(‘작은 일 쉬운 일’), 김상희(‘산이슬’), 유준(‘꽃집에서 만난 사람’), 장미화(‘아름다운 노래’), 박경애(‘햇빛 내린다’), 옥희(‘푸른 목장’) 등 당시 인기 가수가 대거 등장한다. 이듬해인 1979년 3월 제작한 건전생활가요(지구레코드)도 궤를 같이한다. ‘소망’, ‘그럽시다 우리’ 등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한 삶, 꽃밭에 물 주는 여인을 묘사한 ‘앞치마를 두른 여인’ 등을 담았다. 이 음반 역시 김국환, 세샘트리오, 윤세원, 하수영, 선우혜경 등 내로라하는 가수와 한국방송(KBS)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금지와 처벌의 대상인 민중가요와 정반대로 독재 정권에서 전성기를 누린 건전가요는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찬밥 신세가 됐다. 대통령 직선제로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6공화국)가 모든 음반 마지막에 건전가요를 싣도록 한 ‘삽입 의무제’마저 폐지하면서 건전가요는 순식간에 가요계에서 퇴출됐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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