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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미련의 힘[소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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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엔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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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주인공 퓨리오사의 모습.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다 왼쪽 팔을 잃는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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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사는 미련하다. 어릴 적 젖과 꿀이 흐르는 ‘녹색의 땅’에서 황무지로 납치당하던 날, 그녀를 구하러 머나먼 길을 달려온 엄마는 분명 당부했다. 뒤돌아보지 말 것, 떠나온 길대로 앞만 보고 내달릴 것, 부디 혼자라도 살아남을 것.

굳게 지키려던 당부는 황무지의 야만인들이 엄마를 향해 겨눈 총소리 한 방에 무너지고 만다. 결국 뒤돌아 제 발로 야만의 세계에 들어선 퓨리오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수밖에.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가 미련(未練)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면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다.

미련은 고질병인지 퓨리오사는 이후로도 제 버릇 남 못 주고 자꾸만 뒤돌아본다. 수년을 버티며 마침내 황무지에서 탈출할 기회를 잡았는데 사랑하는 이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핸들을 적진으로 돌린다. 자기 살길 내팽개치고 또다시 지옥행. 그 대가로 퓨리오사는 팔을 잃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잃지만, 끝내 자기 뒤에 남겨진 이들을 향한 연민만은 잃지 않는다. 어쩌면 처절한 복수심보다도 제 뒤에 남겨진 인간에 대한 미련이, 황무지 속에서 그녀를 인간으로 살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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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의 사령관 잭(왼쪽)과 어린 퓨리오사가 황무지에서 질주하고 있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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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사뿐일까. 인간의 마음은 대체로 미련 가득해서인지 “뒤돌아보지 말라”는 신의 금기를 어기고 기꺼이 돌이 된 인간의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도 있다. 옛날 옛적 길 가던 스님에게 시주한 공으로 목숨을 부지할 뻔했던 할머니가 있었더랬다. 풍족히 살면서도 타인의 굶주림을 외면한 마을 사람들에겐 천벌을 내릴 테니 당신은 뒤돌아보지 말고 이 산을 넘어가 살아남으라고 스님은 할머니에게 당부했다. 단, 뒤돌아보면 돌이 될 거라고. 그러나 그 할머니, 집도 절도 모두 잃고 그토록 미워했던 영감 죽을 적에 기어이 뒤돌아보고 만다.

미련한 일이다. 그런데 스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홀로 살아남은 그 할머니는 과연 행복했을까. 두고 온 이들, 남기고 온 추억 돌아보지 못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망연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차라리 그 죽음의 목격자가 되길 선택했던 퓨리오사처럼. 설화 속 그 할머니도 자기 뒤에 남겨진 이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돌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돌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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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한 장면. 소녀 퓨리오사는 시타델에서 홀로 도망치는 길 대신 다시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 시타델에 감금된 여성들을 구해낸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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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그렇게 미련 가득한 사람이 내 곁에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무렵 일이다.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엄마는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려 전날 밤 짐을 한 보따리 싸놓곤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하지 못했다. 4교시 체육 시간, 운동장 옆 계단에 엄마 닮은 사람이 앉아 있어 달려가 봤더니 병원에 있어야 할 엄마가 그곳에 있었던 거다.

그땐 몰랐지만, 그날 엄마가 병원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내게로 온 이유를 이젠 안다. 남겨 두고 온 어떤 마음들이 눈에 밟혀서. 그날 한참 동안 운동장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는 걸음걸음마다 멈춰 서서 나를 향해 뒤돌아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덩달아 엄마가 정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손 흔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은 꽤나 힘이 세서 지금껏 내 삶의 의지가 되어주었다. 미련의 힘일 것이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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