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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현장의 시각] 일류도 삼류도 정년 똑 같은 한국 과학, 중국으로 석학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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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국제 학술지 ‘네이처’를 발간하는 스프링거 네이처는 매년 ‘네이처 인덱스’를 발표한다. 전 세계 최상위급 학술지만을 선정해 어느 국가와 어느 기관이 가장 많은 논문을 실었는지 분석한 것으로 과학 연구 수준을 보여주는 잣대다.

지난 18일 발표된 2024 네이처 인덱스는 평소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았다. 종합 순위에서 처음으로 중국이 미국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리, 화학 분야에서 이미 미국을 앞서 있었지만, 생명과학과 보건의학 분야에서 밀린 탓에 종합 순위는 늘 2위였다. 하지만 올해 발표에서 미국을 누르고 중국이 1위가 됐다. 과학기술에 매년 꾸준한 투자를 해 온 중국의 ‘과학 굴기(崛起·우뚝 일어섬)’가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중국은 많은 수의 논문을 쏟아내기만 할뿐 질적으로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번 네이처 인덱스를 계기로 이런 편견도 극복해냈다. 대학·기관별 평가에서도 중국과학원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상위 10개 기관 중 7곳이 중국이다. 미국 하버드대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보다도 중국과학원의 순위가 높다. 한국은 100위 안에 든 기관이 서울대(59위)와 KAIST(84위)뿐이다.

중국의 과학기술 성과를 전하는 기사를 쓰면 늘 ‘어디서 베꼈겠지’ ‘어디서 훔쳤을지 모른다’는 독자의 댓글이 달린다. 한국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대변하는 댓글이다. 하지만 과학기술 분야는 이런 편견이 통하지 않는다.

네이처 인덱스가 발표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기명 고등과학원 부원장이 올 여름 중국의 베이징 수리과학및응용연구소(BIMSA)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부원장은 우주의 기원을 찾는 ‘초끈이론’ 전문가로 한국을 대표하는 이론물리학자다. 2006년 국가 석학에 선정됐고, 2014년에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이 중국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유는 정년 때문이다. 세계적인 연구자도 정년이라는 제약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반면 중국은 성과만 낸다면 나이도 국적도 따지지 않고 전 세계에서 인재를 데려와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중국만이 아니다. 세상을 바꿀 기술이 어디에서 나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 세계가 연구자의 나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는데, 한국만 정년이 어떻고, 국적이 어디 인지를 따진다.

강사라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가 지난해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기후과학연구소 단장으로 임명됐을 때, 국내 언론들은 동양인 여성 최초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단장을 배출했다며 기뻐했다. 정작 이용훈 UNIST 총장은 인건비와 정년이라는 제약 때문에 강 교수를 붙잡을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중국 정부와 민간 기업의 투자를 합친 국가 연구개발(R&D) 총 예산은 2020년 기준으로 404조원이다. 한국의 4배 수준이다. 중국은 과학기술의 투자 규모나 제도의 유연함 모두 한국을 압도한다. 이 차이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뜬금없이 R&D 예산을 삭감하면서 중국을 추격할 시간을 스스로 버렸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응용 기술과 기업들의 제조 역량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서는 부분이 많다. 정부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투자하고, 연구자에 대한 불필요한 제약과 굴레를 풀어주면 한국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번 주에 내년도 R&D 예산안을 발표한다. R&D 생태계를 혁신할 여러 방안도 함께 나온다고 한다. 부디 이번에는 말의 성찬이 아닌 획기적인 투자와 혁신의 의지가 담겨 있는 정책이 나오기를 바란다. 중국과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종현 기자(i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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