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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유석재의 돌발史전] 노인이 원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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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시각에서 본다면, 과연 본받을 어른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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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서울 '지하철 빌런'의 상징적 존재인 1호선의 일명 '자르반 8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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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이 소셜미디어에서 다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가해자 44명 중 일부의 신상이 공개돼 몇 명은 직장에서 퇴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젊은 세대의 ‘공정’에 대한 열망과, 그것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회적 분노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시 가해자 중 그 누구도 제대로 된 심판과 처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이 ‘허 참, 20년 전 다 끝난 얘기를 왜 이제서야…’라며 뒷짐 지고 선비 흉내를 낸다면, 그럴 리야 없겠지만 ‘뭐 젊었을 때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크게 비난 받을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막말을 한다면, 이젠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렵게 됐습니다.

몇 년 전 트로트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던 젊은 지인이 “활동하기 참 힘들다”고 털어놨던 적이 있습니다. 고령층 회원의 비율이 높은 그곳 팬카페에서 해당 가수의 성공 요인을 나름대로 자세히 분석한 글을 올렸더니 “논문 쓰고 있냐?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이 있으면 신곡 스트리밍(음원 실시간 전송)이나 한번 더 하라”는 반응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 ‘맞아요 맞아요’라는 댓글이 이어진 걸 보고 다시 한번 기겁했답니다.

“여기서까지 ‘꼰대질’을 겪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라며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딴 거 할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라’는 식의 말투는 타인의 일상에 개입해 제어하려는 오만한 자세로, 이른바 ‘꼰대’들의 대표적인 발화(發話) 방식이라고 봐야 합니다. 부모나 가족이 아닌데도 상대방에게 이런 말을 함부로 한다면 정말 선을 넘은 것이죠. 더구나 요즘엔 말입니다. 지역과 이념 갈등에 이어 성(性) 갈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세대 갈등일지도 모릅니다. 이건 가정이나 직장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면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균열이 남을 수 있는 갈등입니다. 이해를 하려는 게 아니라 선입관 속에서 그대로 다른 세대를 판단해 버립니다.

2022년 뉴스1·타파크로스 조사에선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에서 산출된 1분기 한국 사회 세대 갈등 지수가 2018년에 비해 5.2%p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처럼 가족을 집 안에 모이게 했을 코로나19 사태가 오히려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든 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뿐, 이제 노인 세대와 청년 세대는 사용 어휘는 물론 사고 방식마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사실상 타국인(他國人)인 셈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는 듣도보도 못했던 새로운 디지털 용어가 신어(新語)인 듯 출현하는 지금, 젊은 세대가 습득해야 할, 최소한 그들이 습득하고 싶어하는 지식은 더 이상 어른들의 경험이나 경륜에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후진국 시절 조부모와 개도국 시절 부모가 선진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키운다’는 말도 나옵니다. 스마트폰 작동법이나 신어의 뜻을 물어보는 쪽은 대개 아이가 아니라 어른입니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불하문(無不下問)’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 든 세대에게 남은 권위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모범’의 제시입니다. 그것은 마을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서슬퍼런 꾸지람과 적확한 고전 인용, 그리고 현실에서 여전히 피와 살로 되살아나는 소중한 경험으로 구성원을 반성케 하고 중심을 잡아주던 대쪽 같은 백발 어르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디에 그런 ‘어르신’이 존재하고 있는가요? 지하철을 타 보면, 다른 빈자리를 놔두고 임산부석에 버티고 앉거나, 이어폰 없이 TV 앱을 크게 틀어 놓거나, 우렁찬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은 청년보다 어르신의 비중이 훨씬 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지하철을 타 보십시오. 버스나 다른 공공장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젊은 사람들에게 뭔가 훈계를 한다면 “일해라 절해라(’이래라 저래라’의 오기)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아널드 토인비는 “세대 간 오해를 줄이려면 기성세대가 먼저 스스로 책망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입니다.

반면 ‘요즘 애들’ ‘MZ세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평가절하되기 일쑤인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네, 말귀 못 알아듣고 싸가지 없으며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는 말이 나오겠죠. 그러나.

―그들은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부당한 관습에 저항하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기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공정(公正)에 어긋나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낭비가 심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글로벌한 문화 체험에 인색하게 굴지 않으며,

―맞춤법은 좀 틀릴지언정 하고 싶은 말을 두려워서 못 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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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언 형제의 영화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구에서 따온 것입니다. 노인의 경험과 지혜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미 변했는데도 새로운 세대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광화문 집회에 청년층이 좀처럼 유입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향후 젊은 세대에 의해 실현되기 어렵고, 끝내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노인이 원하는 나라는 없다(No Country that Old Man Wants)’고 말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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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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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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