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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대갈리, 비계, 작은 대머리가 정류소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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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보고도 믿기지 않는

버스 정류소 이름 요지경

“이번 정류소는 ‘비계’입니다.” 서울 흑석동을 지나던 버스에서 안내 방송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비계라니? 돼지 삼겹살에 붙은 기름?’ 고개를 들어 LED 전광판을 확인했다. 확실히 ‘비계’였다. 그런데 취재해 보니 이곳만이 아니었다. ‘대갈리’ ‘작은 대머리’ ‘가게 앞’ ‘권춘섭 집 앞’ 등 전국에는 희한한 명칭을 가진 버스 정류소가 꽤 있다.

조선일보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비계’ 버스 정류소./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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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대갈리·작은 대머리…

우선 비계 정류소의 유래부터. 비계에는 ‘짐승, 특히 돼지의 가죽 안쪽에 두껍게 붙은 허연 기름 조각’ 말고도 ‘뚱뚱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란 뜻도 있다. 동음이의어로 ‘높은 곳에서 공사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을 일컫는 비계(飛階), ‘근본적 대책 없이 임시변통으로 세운 계략’을 뜻하는 비계(鄙計)도 있다. 하지만 넷 중 어느 하나도 버스 정류소 명칭으론 어색하다.

정류소와 바로 뒤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친 주민들은 “버스 정류소 이름이 왜 비계인지 모른다”고 했다. 유래를 아는 사람을 어렵게 만났다. 이곳에서 36년째 거주 중이라는 김하진(86) 아주대 소프트웨어융합대학 명예교수. “1988년 이사온 당시에도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내가 과학자다 보니, 의문이 들면 풀어야 해요. 묻다 묻다 이발소에서 만난 어르신에게 ‘여기 지세가 날아오르는 닭을 닮았다 해서 날 비(飛)자에 닭 계(鷄) 자를 써서 ‘비계(飛鷄)마을’로 과거에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죠.”

흑석동주민센터 관계자는 “‘비개마을’과 ‘비계마을’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다”고 했다. “과거 흑석동 26·28·33·38번지 일대를 비개마을이라 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알을 품은 닭이 날아오는 형상이라 비계마을이 맞다’는 분들도 있고요.”

사람 머리를 속되게 부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 ‘대갈리’ 정류소는 경기도 안성 고삼면 대갈리에 있다. 칡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칡뫼로 불리다 시간이 흐르면서 갈미로 변했다. 갈미는 다시 상갈과 하갈로 나뉘었는데 이를 합쳐 대갈리라 부른다.

그냥 대머리도 아니고 ‘작은 대머리’ 정류소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에 있다. 대머리 마을은 청주 한씨 본거지. 대촌(大村)이 시간이 흐르면서 대머리로 변했다. 대머리는 (큰) 대머리와 작은 대머리로 나뉘는데, 대머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상당구 방서동, 작은 대머리는 상당구 용암동과 법정동에 속한다. 버스 정류소는 용암동 대머리공원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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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흑석동 비계 버스 정류소./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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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소 이름도 ‘대물림’한다

한국인에게 ‘욕쟁이 할머니’는 기분 나쁘기보다 푸근하고 친근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경기도 포천 소흘읍에 있는 이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같은 상호의 식당이 있다. 시래기 정식, 불고기, 들기름 두부, 감자 빈대떡으로 이름난 맛집.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버스 정류소에 식당 상호가 붙게 됐다. 경기도 의왕시에도 ‘배꼽’이라는 한정식집 옆에 같은 이름의 버스 정류소가 있었지만, 식당이 폐업하면서 버스 정류소도 사라졌다.

밑도 끝도 없이 ‘가게 앞’이란 버스 정류소가 경기도에 두 곳이나 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상호가 없어도 다 안다. 근처에 가게가 ‘거기’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주시 산남동의 버스 정류소는 백반집 앞에 있다. 물류창고가 밀집한 이 지역에 가게(식당)는 이 백반집뿐이다. 경기도 수원시 ‘가게 앞·평동’ 역시 자동차 정비·공업사가 모인 지역에 있는 백반집 옆이다.

‘우리나라최대왕릉군인동구릉’은 국내에서 가장 긴 버스 정류소 이름일 듯하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비롯, 왕릉 아홉이 모여 있는 국내 최대 규모 왕릉군으로, 이를 과시 또는 홍보하기 위한 의욕에서 붙여진 정류소 명칭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태백시 상사미마을에는 ‘권춘섭 집 앞’ 버스 정류소가 있다. 권춘섭씨는 유명 인사나 역사적 인물이 아닌, 평범한 마을 주민. 그런데 얼마 전까지는 ‘권상철 집 앞’이었다. 권상철씨는 권춘섭씨의 아버지. 사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상철씨의 아내, 그러니까 권춘섭씨의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다. 집이 외진 곳에 있었고, 권씨의 아내는 통원 치료를 위해 버스를 타러 정류장까지 가기 힘들어했다. 권씨와 마을 주민들은 태백시에 “집 앞에 정류소를 세워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결국 정류소가 권씨 집 앞에 세워졌지만, 주위에 아무것도 없어서 권상철씨의 이름을 따게 됐다. 이후 권상철씨가 사망하자 정류소 이름이 ‘권춘섭 집 앞’으로 바뀌어 대물림된 셈이다.

◇이름 팔아 경영 적자 개선한다

앞으로 독특한 버스 정류소 이름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자체들이 만성적 시내버스 경영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버스 정류소 명칭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시는 2021년 버스 정류소 명칭 민간 판매를 시행했다. 지하철 역명 판매 사업은 많지만 버스 정류소 명칭 병기 판매는 전국 최초. 정류소 명칭을 구매하면 표지판·노선 안내도에 업체 이름이 들어가고, 버스 안내 방송에도 노출된다. 2021·2022년 총 3억90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서울시도 버스 정류장 명칭 판매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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