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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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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대선, 예상 깨고 1차 투표서 무명 개혁파 후보가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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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란 대선에 출마한 개혁 성향 마수드 페제시키안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의 후임을 뽑는 이번 대선에서 페제시키안은 강경 보수가 낙승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1차 투표 1위를 차지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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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 보수 후보가 낙승하리란 예상을 깨고 무명에 가까운 개혁파 정치인이 1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하는 이변이 벌어졌다. 국제적 고립에 날로 심화하는 경제난, 2022년 ‘히잡 시위’ 이후 누적된 체제에 대한 불만이 동시에 터져나왔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선거는 지난 5월19일 헬기 추락으로 사망한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의 후임을 뽑기 위해 치러졌다.

◇개혁파 후보의 깜짝 1위 ‘신선한 충격’

지난 29일 이란 내무부는 전날 치러진 대선 투표 결과 총 4명의 후보 중 개혁 성향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전 보건장관이 42.5%로 최다 득표자가 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어서 강경 보수 성향의 사이드 잘릴리 전 이란 핵 협상 대표가 38.6%를 득표해 2위를 했다. 과반 득표한 후보가 없으면 1·2위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를 하는 이란 대통령 선거법 규정에 따라 두 사람은 이달 5일 열리는 결선 투표에서 다시 맞붙게 됐다. 당초 유력 후보였던 공군 사령관 출신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13.8%의 낮은 득표율로 탈락했다.

이로써 2021년 이후 3년 만에 이란 대선에서 보혁 대결이 벌어지게 됐다. 대선에서 결선 투표를 치르는 것은 2005년 이후 19년 만이다. 1·2위 간 득표율 차이가 3.9%포인트에 불과해 결선 투표에서 보수 표심이 뭉치면 잘릴리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선거에 대한 냉소로 투표장을 외면했던 청년층과 개혁 지지 세력이 대거 투표에 나서면 판세가 뒤집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대선의 유권자는 총 6145만여 명이지만 총투표 수는 2453만여 표로 최종 투표율은 40.3%에 불과했다.

지난 9일 총 6명의 대선 후보가 발표됐을 당시, 인지도가 낮은 페제시키안이 유일한 개혁 성향 후보로 지목되자 서방은 물론 이란 내에서도 ‘구색 맞추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이끄는 강경 보수 지도층이 선거가 민주적으로 진행됐다고 선전하려 당선 가능성이 낮은 후보를 들러리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페제시키안이 서방과 대화를 통한 경제난 해소, 히잡 강제 착용 반대 및 단속 완화,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여성·청년을 중심으로 지지세가 모였고, 하산 로하니와 모하마드 하타미 전 대통령 등 개혁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지지 선언도 이어지며 본격적인 세몰이가 시작됐다. 6월 14일 발표된 첫 여론 조사에서 3위였던 페제시키안은 24일 선두로 급부상한 이후 5번의 조사에서 단 한 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위기를 느낀 강경 보수 세력이 투표일 직전 후보 단일화에 나섰으나 결국 페제시키안을 꺾는 데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보수 표심은 갈리바프가 아닌 잘릴리를 선택했다. 갈리바프가 단판 승부를 예상하고 중도 유권자까지 노리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내세운 반면, 잘릴리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강경 보수 정책을 택해 선명성 경쟁에서 승리했다.

◇소수민족 가정 출신 페제시키안 VS 전쟁 영웅 잘릴리

결선에서 맞붙게 될 페제시키안과 잘릴리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다. 페제시키안은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버지와 쿠르드족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란 사회의 비주류다. 군 복무 후 의대에 늦깎이로 입학, 심장외과 전문의가 됐고 타브리즈 의대 총장을 지냈다. 1997년 하타미 대통령 시절 정치에 입문해 보건 장관을 지내고 이후 타브리즈에서 5선을 했다. 지난 2021년 대선에 도전장을 냈으나 헌법수호위원회 심사에 탈락해 출마하지 못했다.

반면 잘릴리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인 이란의 주류 보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어 ‘살아있는 순교자’로 불린다. 시아파 이슬람 정치 사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하다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란 핵 협상 수석 대표를 맡아 자국의 핵 주권을 역설했고, 하메네이의 정책기획 수석을 거쳐 최고국가안보회의 서기를 역임하는 등 하메네이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번이 대선 3수째다.

국제사회는 이란에 다시 개혁 성향 정권이 들어서는 ‘선거 혁명’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로이터와 CNN 등은 “이란의 권력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에게 집중되어 있다”며 “개혁파 대통령이 당선돼도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란과 미국·서방 간 대립이 일부 해소되고 경제 제재가 완화하는 것만으로도 이란 내 정치 역학이 바뀔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과정에서 각각 러시아와 하마스·헤즈볼라·예멘 후티 등을 지원해 온 이란의 태도 변화로 이어지며 세계 정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유권자 환멸에 역대 최저 투표율

1차 투표의 최종 투표율은 40.3%에 불과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총선과 대선을 모두 포함해 역대 최저치다. 이란 정부가 이날 무려 세 차례나 투표 종료 시각을 연장하며 본래 오후 6시에 끝날 예정이었던 투표를 밤 12시(자정)까지 연장했지만 최악의 투표율이 나왔다. “투표율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지속 여부가 달렸다”는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독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란 국영 IRNA통신 등 현지 언론들은 낮은 투표율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분위기다. 반면 서방 언론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이란 국민의 냉소와 환멸이 드러났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2022년 ‘히잡 시위’로 확인된 이란 체제의 경직성에 대한 불만이 신정(神政) 통치 세력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고, 이는 오랜 제재로 극심해진 경제난과 맞물려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선 ‘거부’로까지 이어졌다.

보수층보다 중도·개혁 성향의 유권자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분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AFP와 르몽드 등은 “이란의 개혁 진영 내에서마저 투표 참여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고 전했다. 2021년 물러난 하산 로하니 정부의 개혁 실패,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파기 등을 겪으면서 개혁파 대통령이 들어서도 상황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투표율이 높다 한들 이슬람 공화국의 신정 체제를 ‘민주주의’로 분칠하는 데 악용될 뿐이라는 우려도 크게 작용했다. 이 때문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 여성 운동가 나르게스 모하마디 등은 “대선 투표를 보이콧하자”고 주장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결국 투표로 정권에 대한 헌신을 보여줄 것을 촉구한 데 대한 거부감이 드러났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국민의 무관심과 성직자들에 대한 반대가 섞여 투표율이 낮아졌다”고 평했다.

낮은 투표율 와중에도 무려 100만표 이상이 무효 처리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는 전체 유효표 2453만표 중 4%가 넘는다. 블룸버그와 AP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메네이가 이끄는 신정 지도층이 전례 없는 수준의 반대에 직면했으며, 선거에 대한 대중의 환멸 역시 더 커졌다”고 분석했다.

나흘 남은 결선 투표에선 투표율이 상당히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보수 유권자들이 결집하고, 페제시키안 지지층의 ‘유권자 동원 경쟁’이 벌어질 수 있어서다. 특히 2022년 히잡 시위를 겪은 젊은 유권자를 중심으로 개혁파에 대한 기대 심리가 살아나 콘크리트 지지층을 보유한 보수와 접전 양상이 벌어지면 투표율이 껑충 뛰어오를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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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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