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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나치” 손가락질받던 극우, 이젠 MZ와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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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합, 프랑스 총선 사상 첫 1위… 좌파연합 2위, 집권 여당 3위

과격성 벗고 외연 확장하며 기성 엘리트 정치 불만 끌어안기 성공

조선일보

프랑스 조기총선 1차투표에서 극우 성향의 정당인 국민연합(RN)이 압승을 거두면서, 올해 29세인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의 총리 등극 가능성이 커졌다. 사진은 바르델라 대표가 지난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박수를 치는 모습.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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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치른 프랑스 조기 총선 1차 투표 결과,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이 1위를 차지했다. 독일 나치 점령기를 뺀 230여 년간의 프랑스 근현대 정치사에서 극우 세력이 총선 최다 득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RN의 득표율은 33%(공화당 내 RN 지지파 포함)로 1위였다.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를 결정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중도 연합 앙상블은 3위(20%)에 그쳤다. 2위는 좌파 연합 신인민전선(NFP·28%)이었다.

2차 투표가 남긴 했지만, 극우로 분류되는 RN이 자유민주주의 선도국 중 하나인 프랑스에서 최다 득표를 하자 충격이란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때 나치를 연상시켰던 고리타분한 정당 이미지를 탈피, 기성 엘리트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을 끌어안는 데 성공한 RN의 ‘변신’ 전략이 잘 먹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1972년 국민전선(FN)이란 이름으로 창당한 RN의 초기 당원 중엔 실제로 독일 나치 부역자 등 20세기 유럽 제국주의·전체주의 사상에 물든 이가 많았다. FN을 창당한 장마리 르펜(96)은 홀로코스트(2차 대전 중 독일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가 과장됐다고 깎아내려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21세기 들어 다양성과 포용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서 백인 우월주의적 의식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FN의 설 자리는 좁아져 갔다.

비주류 정당이란 한계에 갇혀 있던 FN은 2011년 장마리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55)이 당을 물려받으며 큰 변화를 맞았다. 당명을 국민연합(RN)으로 바꾸고,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로 논란을 빚은 FN의 초기 멤버들을 대거 청산했다. 이 과정에 아버지 장마리 르펜까지 제명했다. 구세대의 빈자리는 젊고 유순한 정치 신인으로 채웠다. 2년 전 대표에 오른 조르당 바르델라(29)가 상징적 인물이다. 훤칠한 외모, 온화한 언변을 내세워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청년층이 함께 사진 찍고 싶어 하는 스타가 됐다.

하원 의원 577명 전원을 새로 뽑는 이번 선거에서 극우 연합은 절반에 가까운 총 260개 선거구에서 1위를 했다. 약 80개 선거구에서 후보자가 과반을 득표해 당선이 확정된 가운데, 이 중 37명이 RN 소속이었다. 프랑스는 지역구별로 당일 총 투표 수의 50% 이상, 등록 유권자 수의 25% 이상 득표를 동시에 달성하지 않으면 1·2위, 혹은 득표율 12.5% 이상 후보자들이 맞붙는 2차 투표를 한다. 나머지 약 500개 선거구에선 7일 2차 투표가 벌어진다. 1차 투표의 득표율이 그대로 이어질 경우 RN은 원내 최대 정당에 오르게 된다. 최종 의석 예상치는 240~270석에 달한다. 극우 연합 전체로는 최대 310석을 얻어 과반(289석) 달성도 가능한 상황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RN이 의회 권력을 장악할 경우, 프랑스에서는 22년 만에 정치 노선이 전혀 다른 대통령과 총리가 국정을 이끄는 ‘동거 정부’를 보게 된다.

뉴욕타임스 등은 “극우는 50여 년간 프랑스 정치에서 금기된 존재(pariah)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RN의 실질적 ‘오너’인 르펜 부녀의 대를 이은 노력, 프랑스와 유럽 내 사회·경제적 변화, 기성 엘리트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이들을 프랑스 정치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고 분석했다. 이번 투표에서 18~24세 유권자의 48%, 25~34세 유권자의 38%가 RN을 찍는 등 젊은층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여기엔 젊은 ‘스타 당수’ 바르델라의 개인적 매력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많다. 동거 정부 출범 시 차기 총리가 유력한 바르델라 대표는 이날 “모든 프랑스 국민을 위한 총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르델라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외국인 혐오 정당’이라는 RN의 옛 이미지 희석에 일조하고 있다. RN의 실질적인 리더인 마린 르펜은 원내대표를 맡고 있다.

이전의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에선 벗어났다 해도, RN은 여전히 강력한 이민자 유입 통제와 유럽연합(EU)의 권한 축소 등을 주장해 극우로 분류된다. 한편으론 RN은 공공 서비스와 복지 확대, 정년 연장 반대 등 좌파의 포퓰리즘적 정책을 대거 수용했고 그 과정에 제조업·사무직 노동자, 공공 부문 근로자의 RN 지지세가 크게 확산했다. 포퓰리즘 노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RN이 정권의 한 축으로 들어서면 마크롱이 추진해 온 연금 개혁과 노동 개혁 등이 급속히 힘을 잃을 수 있다. 마크롱은 지난달 EU 입법부에서 활동할 자국 의원들을 선출하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RN의 약진에 참패하자,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치렀는데, 이 결단이 승부수가 아닌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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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하경


RN의 약진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마린 르펜은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21%를 득표하며 결선에 진출했고, 5년 후 2022년 대선에서 또 결선에 진출해 42%를 득표했다. 르펜 돌풍에 힘입은 RN은 그해 총선에서 89석을 확보하며 의회 내 제3정당으로 급부상했다. 이번 총선에서 RN이 예상대로 240~270석을 얻게 될 경우 RN이 제1정당이 되는 동시에 차기 대선에서 대통령마저 배출할 가능성도 커진다. 마크롱의 임기는 2027년까지다.

이번 총선 1차 투표 결과에 또 하나의 충격은 마크롱이 이끄는 집권당 르네상스의 참패다. 르네상스가 이끄는 범여권 정당연합 앙상블의 득표율은 20%대로, 예상 의석수는 60~90석에 불과하다. 결선 투표 과정에 반(反)극우 세력이 결집할 경우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앙상블은 기존 의석(250석)의 절반 이상을 잃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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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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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나 여당의 인기가 떨어진 데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마크롱의 무리한 ‘소신 정치’가 근본적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는 2017년 대통령이 된 이후 한결같이 프랑스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업 규제 완화, 경직된 노동법 개정,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등을 추진해 왔다. 반면 연금 개시 나이(정년)를 기존 62세에서 64세로 늦추고, 유류세 인상에 나서는가 하면 공무원 감축에도 나섰다. 이러한 정책은 프랑스 서민과 근로자 계층의 큰 반발을 낳았다.

“프랑스에 옳은 일을 하겠다”는 신념을 드러내며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인 모습은 ‘오만한 엘리트’란 인상을 줬다. 2022년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잃으면서, 의회를 ‘패스’하고 개혁 정책을 단독 입법하는 모습까지 보이자 이러한 인상은 더욱 굳어졌다. 일간 르몽드와 리베라시옹 등은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그 대안으로) 극우 세력에 대한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린 측면이 있다”며 “스스로 불러온 패배”라고 분석했다.

☞국민연합(RN)

극우 성향의 정치인 장마리 르펜이 1972년 창당했다. 무슬림 차별 발언, 이민 제한 등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1986년 국회 입성에 성공했고, 2002년 대선에선 득표율 2위에 올랐다. 2011년엔 르펜의 딸 마린 르펜이 당대표에 취임했고, 2022년 젊은 정치인 조르당 바르델라가 대표직을 이어받았다. 지난달 30일 총선 1차 투표에선 33%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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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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